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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빌

Kill Bill: Vol. 1

 어느 한적한 오후, 행복한 결혼식을 앞둔 제인 리메인과 그녀의 배우자, 그리고 모든 하객들이 의문의 조직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그로부터 5년 후, 코마 상태의 제인은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어렵게 깨어난다. 그리고 피로 얼룩진 과거가 그녀의 뇌리에 스치며 서서히 복수의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칼날이 첫 번째로 향하는 곳은 다름아닌 교외의 한 가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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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 110분

액션 · 스릴러 · 드라마 · 범죄 

 제인 리메인이 돌아온다. 사무라이 소드와 그에 못지않게 벼린 복수심을 갖고서.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다. 지금 그는 잔디밭에 놓인 파스텔톤의 가정집 앞에 와 있다. 그걸 ‘이곳’에 돌아왔다고는 할 수 없다. 여기서 산 적 없고, 앞으로도 살지 않을 것이므로. 그는 차에서 내려 마당에 들어섰다. 뒷문으로 들어가거나 창문을 넘어갈 수도 있지만 돌아온 제인, 제리는 그러지 않는다. 그는 현관으로 가 벨을 눌렀다. 곧 문이 열리고 부스스한 머리의 여자가 고개를 내민다. “안녕, 시몬.” 제리가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캡 아래의 얼굴을 보고도 시몬은 한참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가 멍청한 얼굴로 물어왔다. “어……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술 냄새가 났다. 제리는 찡그리며 웃다가 그가 쥔 술병으로 시선을 내렸다. “사실 꽤 늦었는데요.” “아니, 아직 해가 떠 있으니까……넌 저녁에 오잖아. 모네도 아직 안 돌아왔고.” “음.” “그치?” “물어볼 게 있어요. 두 개 정도.” “응, 말해봐.” 시몬이 문간에 삐딱한 자세로 기댔다. “하나. 애가 있어요? 둘. 날 베이비시터로 착각한 거예요?” “헷갈리는데……어느 쪽에 화가 난 거야?” “화났단 건 알아줘서 고맙네요.” 

 술병을 뺏어든 제리가 시몬의 머리를 후려쳤다. 거의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시몬은 크게 휘청거리면서도, 유리 날이 목을 그으려는 순간 유연하게 허리를 뒤로 눕혔다. 하지만 젖혀진 몸은 되돌아오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가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제리는 자신이 시몬을 죽여버린 줄 알았다. 물론 그러려고 온 거긴 했지만. “너구나. 그리고……화가 정말 많이 났네.” 아직 살아있는 시몬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에게 경각심을 심을 목적으로, 그리고 확실히 그를 죽여버리기 위해 제리가 깨지고 남은 유리병을 얼굴에 내던졌다. 이번에 시몬은 몸을 옆으로 굴려 죽음을 면했다. 바닥에 부딪친 유리병 반쪽이 마저 터져 나갔다. 시몬은 잔해에 긁힌 뺨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갓 태어나거나 곧 죽어버릴 짐승처럼 바들거리는 꼴로. 제리는 그가 드디어 앞으로의 일을 두려워하게 된 건지, 알코올 금단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전자였으면 좋았겠지만 솔직히 후자 같았다. 화를 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서운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제리가 입을 열었다.

 “예전엔 더 빠릿빠릿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건 치앙.” “맞다. 당신은 항상 취해있었지. 걘 잘 지낸대요?” “몰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데 잘 있지 않을까?” “매번 이런 식이니까 나도 궁금해지는 거죠.” 제리가 천천히 시몬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엔 작긴 해도 진짜 칼이 들려 있었다. 그쯤에서 시몬도 이번에야말로 정말 나쁜 일이 닥쳐왔단 걸 깨달았다. 뒷걸음질로 서서히 멀어지던 시몬이 주방에 다다랐다. 자신을 지켜줄 무언가가 그곳에 있길 바라면서. 하지만 교외로 이사 오며 과거를 떠올릴 만한 물건은 전부 치워버렸다.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모네가 총을 입에 넣고 빠는 일만은 없어야 했으니까. 어쨌든 시몬은 노력했다. 그런데도 남편은 떠났고, 덕분에 지금 여기 완전히 혼자 남겨졌지만. 그래도……테팔 티타늄 액티쿡 프라이팬만은 아직 그의 편이다. “도대체 아는 게 뭐예요?”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제리가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고, 깡! 맑은 금속음이 울렸다. 제리는 복수의 칼날을 막아 세운 프라이팬 바닥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베이비시터는 저녁에 온다는 거.” 검은 방패 뒤에서 비죽 올라온 얼굴이 웃었다. 제리가 근래 본 면면들 중에서 가장 희망에 찬 낯이었다. 예전이었다면 같이 바보처럼 헤헤거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와 친밀한 시간을 보내기엔 늦었다. 그러기엔 끔찍한 일들을 지나왔다. 그것도 아주 많이.

 제리의 사감이 담긴 일격을 열세번하고도 절반쯤 막아낸 시몬이 제 팔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베이비시터는 대체 언제 오는 거지.” 제리의 칼은 부러졌지만 테팔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상황이 제게 훨씬 더 좋지 않단 건 시몬도 알 수 있었다. 집은 거대한 모네가 휩쓸고 간 듯한 풍경이었고, 언제부턴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의 등짝에 유리 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거기다 방금 어깨를 베였다. “한참 멀었거든요. 포기하고 죽어요.” “다른 애들도 죽일 거야?” “네. 아니면 전부 당신 탓으로 돌릴까요?” “음, 뭐를 얼마나?” “일단 제 부모님이 증발하고 여자친구가 떠난 것부터 시작해서.” “어, 거기서부터? 아니. 잠깐…….” 시몬이 허공에 손가락을 까딱였다. 주판알을 튕기는 차이나타운의 중국인처럼 보였다. 주산은 고사하고 당장 계산기를 꺼내 두들기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분명했지만. 주판알 대신 데룩데룩 구르던 눈동자가 맥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가, 정면을 응시했다.  “그것까진 내 잘못이 아니지.” 시몬은 여전히 제리와 그가 겪은 일들에 무관심해 보였다. 하지만 그게 모든 책임을 져도 된다는 의미가 되진 않는다. “알아요. 농담한 거예요.” 마침내 코앞까지 바짝 접근하는 데 성공한 제리가 그를 주저앉혔다. “이제 좀 끝내죠.” “안 되는데…….” 애 올 때 됐어. 

 그 생각과 동시에 현관 안으로 작은 발 한 쌍이 걸어들어온다. 반쯤 벗은 가방을 바닥에 질질 끌고 들어오던 모네가 우뚝 멈추어 섰다. 제리는 황급히 들고 있던 칼을 숨기려 했지만, 이미 망가진 칼날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든 것보다 덜 위험해 보였다. 제리는 손잡이만 남은 칼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리고 아이에게 애써 웃어주려 했다. 그 앙증맞던 발이 허공에서 회전해 복부에 내리꽂히기 전까지는. 머리 위에서 주방도구가 조리대로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하늘이 무너진다면 분명 그런 소리가 날 거다. 제리는 시몬의 바로 옆자리에 처박혀서 불평했다. “애를 어떻게 키운 거예요?” “가끔은 나도 그게 궁금해…….” 시몬은 서랍장을 열어 싱크대 밑에 숨겨둔 술병을 꺼냈다. “가르친 적도 없는데 말이야.” 술이 정말로 간절한 건 제리였지만, 모네가 가방을 쌍절곤처럼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 모금씩이나 청할 여유는 없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그리고 실제로 피를 토하며), 제리는 이 복수의 고리가 두 세대는 더 이어지리라 믿었던 자신의 각오가 얼마나 오만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제인 리메인은 돌아와야 했지만, 모네는 떠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 집에선 누구도 죽지 않는다. 그들이 이 황당한 우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 영원히. “당신이 왜 늘 술을 마시는지 알 거 같아요.” 제리가 소감을 말했다. “딱히 제정신이어야 할 이유도 없는 거죠.” “아니. 난 그냥 끊지 못하는 것뿐이야.” 병 입구를 핥던 시몬이 아쉬운 얼굴로 빈 술병을 내려두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시작된 건지는 궁금하지도 않지.” “그게 복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에요?” “아니. 술. 아까부터 술 얘기하고 있었잖아.” “관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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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정보

출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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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리메인

Jain Remain

포도잼, 홍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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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밴더월 

Symon Vanderwa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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