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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Inception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가 생각을 훔치는 특수 요원 하기리 유우야.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가드 역할의 사카키바라 신까지 영입하지만, 작전 당일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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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 148분

SF · 첩보 · 스릴러 · 드라마 · 하이스트

선체에 부딪친 파도가 하얗게 바스라졌다. 신은 난간에 팔을 기대고 구부정한 자세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판의 어디에서 밖을 내다보든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수평선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장관이었겠지만 신에게는 아니었다. 그 잠깐 사이 지루한 경치에 변화가 생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그대로 멈췄다. 바다의 짠 내음이 강하게 느껴졌다. 신은 숨을 내뱉으면서 난간에서 몸을 떼어냈다. 바다는 더 이상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가 몸을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친 남자는 막 일어난 모양새였다. 그의 뒤편으로 갑판에 마련된 야외 카페테리아가 보였다. 방금 전까지 두 사람이 앉아있던 곳이다. 신은 사람 없이 커피 두 잔, 의자 두 개만 서로 마주보고 있는 테이블로 돌아가 자리에 풀썩 앉았다. 그의 앞에 놓인 커피잔은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작게 웃으면서 자리에 돌아왔다. 신이 의자의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비스듬하게 앉았다면, 남자는 바른 자세로 앉아 다리를 꼬고는 무릎에 깍지 낀 손을 걸면서 상체를 조금 숙였다. 그는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뭐가."

 

신은 이곳에서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안 든 걸 하나 꼽자면 바로 그 질문이었다. 혹은 그런 질문을 던지는 남자의 존재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잘 차려입은 정장에 단정한 금발이 돋보이는 남자, 하기리 유우야는 그의 대답을 듣고 뒤로 기대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느릿한 동작은 정말 이곳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위적인 행동같이 느껴졌다. 혹은 자신의 선박을 자랑하는 주인장처럼, 어딘가 과시하는 태도로도 비쳤다. 아니면 고객에게 높은 값을 치르고 상품을 사게 하기 위해 바람을 잡는 관광 가이드 같기도 했다. 유우야는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신을 보면서 말했다.

 

"크루즈 말이야."

"난 이런 곳 별로야."

 

신은 차라리 유우야 대신에 날아가는 갈매기를 보기로 하고는 커피잔을 들었다. 높이가 낮고 옆으로 동그란 고리가 달린 하얀색 잔이 유달리 낯설게 느껴졌다. 커피를 즐기지 않는 까닭이다. 가까이 든 커피잔에서 고급스러운 원두 향이 올라왔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가 그대로 잔을 내려놓았다. 입에 맞지 않았다. 예상하기는 했다.

 

"아. 좀 더 프라이빗한 장소가 취향?"

"무슨 헛소리야."

"내 말은."

 

반대로 유우야가 잔을 들고 커피를 마시는 모습은 매우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는 여유롭게 커피의 향기를 음미하고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줄곧 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신은 그의 시선이 껄끄럽게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려도 그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두 명이서 타는 요트 쪽이 좀 더 마음에 들었을까, 싶은 거지."

 

신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 중에 영양가 있는 말이 단 한 마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종류의 말들에 대꾸할 가치를 못 느끼는 유형의 인간이었으므로 그의 말을 싸그리 무시했다. 그런데도 유우야는 신이 난 사람처럼 즐거운 목소리로 혼자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때. 같이 이태리의 섬 같은 데라도 갈까? 오붓하게, 우리 둘이서."

 

그는 사랑스러운 연인을 대하는 사람처럼 나긋나긋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직전보다 조금 작아진 목소리는 그가 표현한 그대로 좀 더 '프라이빗'했고, 멀리 서있는 사람들에게는 밀어를 은밀하게 속삭이는 모습처럼 비밀스러워 보였다.

 

"……."

 

그러나 신은 여전히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커피잔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렁이는 커피의 표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인상을 팍 쓰고 있는 사카키바라 신의 얼굴이다.

신은 그 얼굴을 보다가, 거의 마시지 않은 커피잔을 들고선 바닥에 내던져버렸다.

 

쨍그랑!

 

테두리에 고풍스러운 테가 둘러져있던 잔은 이제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참히 깨져 산산조각이 났고, 쏟아진 커피는 깔끔한 바닥에 큼지막한 갈색 얼룩을 만들어냈다. 테이블 다리와 유우야의 바지에도 커피가 튀었다. 이런 소란을 벌이고도 신은 유우야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유우야는 조금도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신의 돌발행동도, 비싼 컵이 깨진 것도, 바지에 묻은 얼룩도 그를 놀라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신에 그는 흥미로운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관찰하는 사람의 눈, 면접관이나 보일 법한 눈빛이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금세 슬며시 웃어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신은 확신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니?"

"당신네들 수법은 뻔하다고 누가 경고를 해줬거든."

"재미있네. 훌륭한 선생님을 둔 것 같은데, 이름을 들어도 될까?"

"당신이 알 바 아냐. 그보다…."

 

유우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안쪽으로 밀어넣고는 아까 신이 서있던 곳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불성실한 대화 태도에 신은 다시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났을 때는 주변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신은 그에게 무언가를 질문해야 했지만, 그 방법을 몰랐다. 어떻게 물어봐야하는 걸까? 그가 잠깐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유우야는 허리를 숙여 난간 아래의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확실한 건 싫지?"

"뭐?"

"괜찮아."

 

바닷바람에 유우야의 희게 빛나는 금색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의 흰 눈은 이제 바다가 아니라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로맨스 영화에 어울릴 만큼 감상적인 목소리, 그러나 신은 그가 자신을 갸륵하게 여긴다고 생각했고, 그런 주제에 그의 말은 무감정하고 기계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차피 순간이야."

 

유우야는 신이 서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면서 자신의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들었고, 신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의 머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 * *


 

"XX."

 

신은 눈을 뜨자마자 욕부터 했다. 그는 방금 전에 총알이 박혔던 이마의 정중앙을 손으로 문질러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런 자국도 없었다. 물론 아프지도 않았다. 신은 이마에서 손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병원에서 쓰는 이동식 환자용 침대 비슷한 물건 위에 누워 있었는데, 그렇다고 주변이 병원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곳은 창고와 연구실을 반반 합쳐둔 것 같은 공간이었다. 적당히 너저분했고 청결이 필요한 곳만은 깨끗했다. 신은 옆의 비슷한 침대에 누워있던 유우야가 깨어나서 팔에서 바늘을 뽑는 모습을 보고는 이마에 계곡이 생길 만큼 험악하게 표정을 구겼다.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에게 새로운 일거리가 들어왔다. 이건 일을 맡기기 전에 잠깐 거쳐야 하는 특별한 테스트였다. 간단해. 어렵지 않아, 정말이야. 유우야가 그런 말을 하면서 그에게 팔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유우야에게 미리 꿈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전해듣긴 했지만 수상쩍은 테스트임에는 분명했다. 그 결과, 그는 유우야가 설계한 꿈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호화 크루즈의 갑판 위에서, 어울리지 않는 정장을 입고 평소에는 입에도 대지 않던 커피를 마시면서.

 

"야. 이게 재밌냐?"

 

신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곧장 그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급한 움직임에 철제 침대가 하마터면 옆으로 넘어질 뻔했다. 이런, 역시 해리슨에게 편안한 의자를 새로 몇 개 들여두라고 하는 게 낫겠어. 유우야는 태평하게 그런 소리나 하면서 누워 있었다. 신이 그의 침상 바로 옆까지 가서 화난 얼굴로 그를 내려다 봤을 때에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빙그레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죽으면 꿈에서 깨어날 수 있거든. 꿈에서 깨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

"그래서 나를 총으로 쏘셨다."

"정확해."

 

유우야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번에는 네게 들키는 게 목적이긴 했지만, 너는 충분히 잘해줬어. 둔한 사람들은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도 꿈이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채지 못하거든. 관찰력이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신은 침상에 앉은 유우야를 팔짱을 끼고 내려다봤다. 그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유우야의 눈은 지금도 그늘 안에서 밝게 빛났다. 꿈 속의 갑판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그를 바라볼 때와 똑같은 눈이었다. 그가 눈을 접고 웃는 모습이 신의 보라색 눈동자에 고스란히 다 비쳤다.

 

"사람은 다 모였어. 이제 너만 있으면 돼."

 

신을 올려다보던 유우야가 회유하듯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신은 그의 손을 쳐내고는 두 걸음 물러나서 그가 바닥으로 내려오는 걸 쳐다보기만 했다. 유우야는 쉽게 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 실제로 그의 방법에는 과격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유우야는 직접 꿈으로 같이 들어가보는 것만이 그들이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줄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단지 그의 편리한 단축키를 신이 당장 이곳을 박차고 나갈 만큼 불쾌하게 여기지는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에게는 신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신은 들어온 일감을 내팽개칠 만큼 화가 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유우야에게 별다른 대꾸를 하진 않았으나 적어도 그의 말을 기다려주기는 했다. 이쯤에서 유우야는 그의 속내가 궁금해졌지만 지금은 사카키바라 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기보다도 그에게 어떤 일을 해주길 바라는지 구체적으로 소개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꿈은 환상적인 공간이지만, 전쟁터보다 위험해지는 것도 한순간이거든. 그래서 여건이 된다면 가드를 고용하는 게 좋지. 총은 좀 쏘는 편?"

"당신보다는 훨씬."

"하하, 농담도."

 

신은 생각보다 쉽게 유우야의 제안을 수락했다. 일을 같이 하게 됐다고 해서 그의 태도가 크게 살가워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모여서 작전회의를 할 때는 한쪽 벽에 기대어 서서 잠자코 듣다가 이따금 의견을 던지곤 했다. 그렇게 신은 유우야와 한 팀이 되었다.

 

팀이라고 해봤자 둘을 포함해서 네 명이 전부였다. 그들은 인원수에 비해 엄청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맡은 상태였는데, 꿈을 다루는 일이 대개 그렇듯 불법적인 일이었다. 신은 그 점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굴지의 제약회사, 팬포드가 엮인 일이라는 걸 들었을 때는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유우야는 그의 가족 내력 때문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거야말로 합법적으로 손에 넣은 정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팬포드의 대표는 공격적인 인수합병과 마케팅 전략으로 팬포드를 전세계적인 회사로 성장시킨 주역이었다. 바로 그 조지 올슨이 이번 일을 의뢰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회사를 여기까지 오게 해준 회사의 수석 약제사가 갑자기 회사를 관두려고 한다면서, 그의 마음을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단, 설득이나 회유가 아닌 인셉션을 통해서. 그게 이 비밀스러운 의뢰를 이곳에 있는 네 명이 수행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학계에 인셉션이 성공한 사례는 몇 건 보고됐지만, 외부에서 한 개인에게 새로운 사고를 심는 행위 자체가 종교·윤리적인 수많은 문제를 야기한 탓에 거센 반발이 일었고 곧 공식적인 모든 연구가 중단되었다. 그래서 인셉션은 물밑에서만 살아남았다.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정반대로 뒤바뀐 사람에 대한 도시전설에 두려워하면서 괜히 자신의 팔목을 살펴보고는 소매를 끌어내릴 만큼의 가느다란 명맥으로만 남은 이야기다. 그럼에도 어딘가에서는 오늘도 꿈 속에서 정보를 훔치고 생각을 심었다. 인셉션은 실재한다.

 

그들의 팀도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였다. 나쁘게 말하면 범죄자 무리였다. 평소에 회의를 할 때면 어디든 의자에 앉아서 몸을 움츠리고 묵묵하게 이야기를 듣다가 경박한 농담을 던지곤 하는 남자는 조지 올슨이었다. 그는 항상 검은색 버킷햇을 쓰고 다녔고 턱에는 짧게 턱수염이 나있었는데, 그런 외모와는 매치하기 어려운 설계자 일을 맡고 있었다. 그가 설계한 꿈은 즉흥적인 엉뚱한 구조를 포함할 때가 많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투사체들로부터 몸을 피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해리슨 언더우드는 조지와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그의 옷차림은 늘 깔끔했지만, 팔꿈치까지 오는 갈색 더벅머리만은 늘 대충 쫌매놓고 다녔다. 그래도 그의 옷차림과 안경만이 그의 학자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인간의 꿈과 무의식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진 연구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탁월한 배우이기까지 해서 꿈 속에서는 누구든 깜빡 속게 만드는 위장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가끔 실험적인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운이 좋게 좋은 결과를 얻어내어 매번 극적으로 유우야나 조지의 반발을 사지 않고 넘어갔다. 그리고 하기리 유우야는 이 팀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그는 포인트맨으로서 타깃의 다양한 정보를 수집했고 적재적소에 사람들을 불러모아 필요한 핵심을 전달해주었으며 의뢰인과의 연락도 본인이 도맡아서 처리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체제에 별다른 불만이 없는 것 같았다. 이쪽이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팀원들과 자주 만나서 회의를 하고 대화하면서 신도 점차 그들에 관한 다양한 것들을 알게 됐다. 조지는 도박 중독자여서 늘 돈이 부족했고 오직 의뢰비를 위해 이 프로젝트를 수락했다. 신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세 명은 한 팀이었지만, 듣자하니 조지가 합류한 건 꽤 최근인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해리슨은 유우야와 일한지 몇 년은 된 오랜 동료였다. 그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이번 일을 받아들였고,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도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를 위해서 참여한 것 같았다. 그는 유우야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다. 신은 해리슨에게서 이전에는 유우야가 팀의 설계자였으나 함께 일하던 동료, 츠즈노 하루나가 림보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자 그 뒤로는 포인트맨으로 완전히 전향했다는 비화를 들었다.

 

"조지 올슨이 그 남자보다 잘해?"

"실력을 평가하려면 우선 분야별로 나눠서 제대로 된 기준을 매기는 게 중요한데,"

"잘하냐고."

"못하지. 슬프게도."

 

나중에 유우야와 둘만 남았을 때 신은 당신, 하고 운을 떼고는 그의 과거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어디서 들었어? 해리슨이지? 유우야는 간단하게 밀고자의 정체를 밝혀냈다. 그러고도 당황스러워 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가 해리슨에게 기대가 없는 거든, 혹은 이번이 두 번째나 그 이상이든 유우야는 태연하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임무는 성공했는데, 빠져나오다가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아직도 깨어나질 못하고 있네. 이제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겠지? 그렇다고 겁 먹으면 안 돼. 그의 말은 거기서 끝이 났다. 그의 진중하지 못한 태도에 또 삐딱하게 선 신이 그를 보면서 물었다.

 

"얼마나 됐는데?"

"글쎄. 올해로 몇 년째더라?"

이후 신은 해리슨에게 그 사건이 고작 3개월 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들었다.

 

신경쓰이는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신은 다른 사람들이 제이크 콜먼의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알았지만 하기리 유우야만은 예외였다. 그는 조지만큼 돈에 허덕이지도 않았고 해리슨 같은 탐구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든 불법적인 의뢰를 원하는 사람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헌신적인 자원봉사자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뭐가 더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를 추궁해봐도 유우야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래도 그와 다섯 번째로 꿈에 들어간 날에는 중요한 걸 건네받기로 약속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그 후로 다시는 없었지만 신은 어렴풋이 그가 의식 불명이라는 과거 동료와 관련된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닐까 짐작했다.

 

신은 막 꿈에서 깨어나 유우야를 바라보았다. 새로 구비한 의자에 몸을 뉘인 그는 종이에 오늘자 트레이닝 기록을 적어내려가고 있었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내가 알아둬야 할 거 뭐 없어?"

"걱정 마. 배워야 하는 건 진입 전에 전부 가르쳐줄 거야."

"그런 거 말고."

"그럼?"

 

유우야가 시선을 들어 신을 쳐다보았다. 신은 그의 눈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가 말하지 않는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설계자에게 강력한 트라우마가 있으면 꿈 속에서도 이레귤러 투사체가 생겨나기도 한다던데."

"그건 또 어디서 들었담."

"안 중요해. 대답은?"

"괜찮아, 조지는 실력자야. 안전한 설계자라고 할 수 있지."

"당신은?"

 

그는 클립보드를 안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난 안 해."

"다시는?"

"영원히."

 

유우야의 대답을 끝으로 잠깐 동안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침묵을 빙자한 긴장감이었다. 신은 여기서 더 할 말이 없었고, 유우야는 이 주제를 더 끌고갈 생각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유우야였는데, 그가 기권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옳거니. 저번에 내가 보여준 꿈이 마음에 든 모양이네."

"헛소리를…."

"하지만 낭만이 있는 여행은 꿈보다도 현실에서 가는 편이 낫지 않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신이 앉은 의자 옆까지 걸어갔다. 그리고는 흔들의자에 파묻히듯 앉은 아이가 일어날 때 도와주듯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일 끝나면 보수도 두둑하게 받을 텐데, 섬으로 요트 데이트나 하러 갈까? 둘이서 오붓하게."

 

신은 짧게 응수했다.

 

"꺼져."

 

그래도 네 사람은 자주 모였다. 넷이서도 모이고 두셋이서 만나는 경우도 잦았다. 그들은 타깃인 아멜리 크루거가 어떤 사람인지 분석하고 꿈의 단계를 기획하며 작전까지의 디데이를 셌다. 운 좋게 절호의 기회까지 찾아왔다. 꿈에 진입한 뒤부터는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변수를 직면하기 십상이지만, 적어도 그 전까지는 그들의 플랜에 아무런 차질도 없어 보였다. 모든 건 사전에 계획한 대로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 * *


 

슬프게도 세상 모든 일이 계획에 따라 충실하게 이행되지는 않는다. 특히나 사람은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가 없는 법이다.

 

신은 유우야가 욕을 입에 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방금 그가 작게 중얼거린 건 욕이거나 최소한 욕에 한없이 가까운 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신과 유우야와 해리슨, 조지를 뺀 이렇게 세 사람은 급하게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운전을 유우야가 맡았지만 오늘은 불행한 사정으로 해리슨이 운전석에 앉았다. 신은 유우야와 같이 뒷자리에 앉았는데, 그가 드림 머신을 확인하면서 연신 전화를 거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작전 당일 아침, 조지를 기다리던 그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그들은 원래 아멜리 크루거가 친척을 만나러 시드니로 향하는 장거리 비행의 두 번째 비행기, 하와이-시드니 노선에서 작전을 실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유우야의 정보책이 기존에 그들이 탈 예정이었던 비행기에 탑승할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돈에 눈이 먼 조지 올슨이 교통편을 빼돌린 것이다. 당연히 조지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유우야는 확인을 마치고 빠르게 그의 배신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세 사람은 더 급하게 움직였다. 아직 로스엔젤러스에서 하와이로 가는 여객기는 탈 수 있었다. 작전에 쓸 수 있는 시간이 기존 계획보다 네 시간이나 짧은 여섯 시간밖에 안 됐지만 아무도 그럼 여기서 포기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는 유우야가 작전의 변경을 알렸고 해리슨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OK 사인을 던졌다. 신은 유우야가 물으면 "마음대로 해."같은 대답을 던지고는 그를 보기만 했다. 유우야는 그의 시선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공항으로 이동하는 동안 재빨리 드림머신의 설정을 변경했다.

 

"오차는 없을 거야! 유우야는 나보다도 산수를 잘 하거든."

"태평하네, 당신들."

"나는 그렇지."

 

해리슨이 쉽사리 수긍했다.


 

* * *


 

아멜리 크루거는 수척해 보이는 얼굴로 비행기에 올랐다. 그를 재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번 계획의 가장 큰 장애물은 두 번째 비행에서도 그들이 아멜리에게 인셉션을 시도할 것이고, 그로 인해 계획이 틀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의뢰인이 이번 일의 결과를 어떻게 판가름할지도 주요한 문제였다.

 

"이대로 다 된 밥을 올슨한테 넘겨주게 되는 거 아니야?"

"되는 데까지 최대한 해봐야지. 멀쩡히 잘 가던 사람을 경유지에서 내리게 만들긴 어렵겠지만."

"어련하시겠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해리슨이 말했다.

 

"우리 팀원들은 참 사이가 좋아. 안 그래?"

 

그들은 이미 씁쓸한 배신을 한 번 겪은 직후라 꿈의 바깥에서 시간을 확인하고 그들을 깨우는 임무를 외부인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들었다. 결국 해리슨이 현실에 남아있기로 했다. 이것 역시 기존의 계획을 상당히 침해하는 결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계의 튜브를 길게 뽑아 늘리던 신은 처음에는 해리슨을 보다가 금방 유우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꿈에선 위장사의 역할이 중요한 거 아닌가. 왜 언더우드가 여기 남는 거지."

"난 연기는 할 수 있지만 설계하는 법은 하나도 모르거든."

"후발대가 기존의 설계를 쓸 가능성이 있는 이상, 이쪽에서도 새로운 수를 써야 해."

"당신, 설계는 이제 안 한다면서."

 

잠깐이었지만 유우야가 말 없이 신을 쳐다봤다.

 

"할 거야."

"그런가."

 

신은 제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손을 내렸다.

 

"할 수는 있고? 꿈을 설계한다는 게 그렇게 한순간이 되는 건 아니잖아."

"그건 문제가 안 돼. 머릿속에 있는 미로만 수천 가지야. 다만……."

"다만?"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나머지는 들어가서 얘기하는 게 어때?"

 

두 사람이 고개가 일제히 해리슨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꼭 꿈속 같네, 하고 농담을 했다. 유우야는 어차피 더 할 이야기도 없다면서 눈을 감고 좌석에 몸을 기댔다. 신은 말 없이 바늘 끝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해리슨이 마지막으로 타이머를 확인하고는 버튼을 눌렀다.

 

솜나신이 투약됐다.


 

* * *


 

"또 망할 놈의 정장이네."

"좀 참아. 그렇게 불편해?"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나까지 입을 필요가 있냐는 거지."

 

신과 유우야는 빌딩이 숲처럼 빼곡한 대로변을 지나고 있었다. 유우야는 익숙하게 거리를 걷다가 고층 호텔과 빌딩 사이의 골목으로 꺾어졌다. 좁은 길의 중간쯤에서 그는 빌딩의 벽을 더듬더니 손잡이를 잡고 위로 밀었다. 그러자 손바닥 두 개 크기의 비밀 사물함이 나타났다. 신이 건물벽의 구조를 살피는 동안, 유우야는 그 안에서 열쇠를 꺼내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세계의 도면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해야 할 일은 같았다. 두 사람은 1단계의 꿈에서 아멜리 크루거에게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유우야가 유명 잡지의 기자라는 설정이었다. 유우야는 너도 같이 하는 일이 아니냐며 응수했지만 신은 자신이야 옆에서 조명을 들고 있는 척이나 할 건데 옷차림이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신은 유우야와 옷 얘기를 하는 대신에 그가 축조한 세계를 구경하면서 걸었다.

 

꿈 속의 도시는 뉴욕처럼 블록 단위로 모든 스트리트가 나뉘어 있었다. 길목 사이사이를 채운 생소한 건물들만이 이곳이 뉴욕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신은 세계의 건축물에 식견도 없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이 중에 어딘가는 그가 직접 말해준 금기를 깨고 따온 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사람이 급하면 어디서 좀 빌려올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여기다."

 

두 사람은 비어있던 오피스에 도착했다. 아멜리가 오기 전에 불을 켜고 커피를 내려두자 제법 그럴싸한 인터뷰 장소처럼 보였다.

유우야는 소파에 앉아서 손목시계와 사무실의 문을 번갈아 봤다. 신은 소파에 팔을 기대고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시선을 닫힌 문의 정중앙에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왜 이번 프로젝트를 수락했냐고 물었지."

"어."

 

유우야는 잠깐 주저하다가 말했다.

 

"성공하면, 림보에 빠진 사람을 깨울 수 있는 약을 받기로 했어."

"알아."

"네가 어떻게 알아?"

"당신이 하는 짓 보면 뻔하니까."

 

신은 소파 주변을 빙 돌아서 그의 옆에 와 앉았다.

 

"그런 약이 있대?"

 

유우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발되었다는 소식은 암암리에 돌았어.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소식이지. 하지만 아직 팬포드에서는 외부에 팔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우선은 회사 내부에서만 사용한다고 들었어."

"그게 판돈으로 걸렸으니, 반드시 이번 일을 성공시켜야 한다. 이건가."

"응. 도와줄 거야?"

 

유우야가 웃으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미스 크루거? 유우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벌어졌다. 신은 아멜리가 들어오고도 자리에 앉아있다가 유우야가 손짓하자 그제서야 조명 기구를 옮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부분의 안내와 설명은 유우야가 맡아서 했다. 그는 아멜리의 명성을 평소에도 익히 들었으며 이번 인터뷰를 얼마나 기대했는지 등을 청산유수로 늘어놓았다. 아멜리는 대부분의 순간에 기뻐했지만 이따금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수줍어하는 걸까? 적어도 그는 평소에 사람들과의 왁자지껄한 대화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어 보였다. 그래도 그가 지닌 긴장감은 두 사람에게는 좋은 시그널이었다. 아멜리가 인터뷰에 성심성의껏 참여할 결심을 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곧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 * *


 

실내. 사무실─낮

아멜리는 사무실 중앙의 붉은색 1인용 소파에 앉아있다. 긴장한 모습이다. 유우야는 맞은편에 앉아 핸드폰 화면을 켜고는 아멜리를 쳐다본다. 신은 묵묵히 조명 기구 옆에 서있다.

 

유우야

요즘은 팬포드의 수석 약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멜리

(민망해 하며)

그 정도는 아니에요.

 

유우야

약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요? 장래희망이 약사가 된 이유라든가.

 

아멜리

그렇게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렸을 때……

 

유우야의 필기 소리에 아멜리의 목소리가 묻힌다. 클립보드의 종이에 사전에 준비된 인터뷰 질문이 인쇄되어 있다. 위쪽부터 순서대로 〈1. 조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2.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당신에게 영감을 주고 안식처가 되어주는 곳.〉 〈3. 팬포드에 입사하게 된 계기〉 〈4. 팬포드에서 일하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5. 팬포드에서 일하면서 있었던 가장 좋은 기억은〉 〈5. 반대로 가장 나쁜 기억은〉. 화면은 5번 질문을 비출 때 길게 멈춘다.

 

아멜리

특별히 없어요. 팬포드는 직원 복지가 정말 좋거든요. 불편한 점이 있다면 도시의 매연 정도일까요. 회사의 문제는 아니죠.

 

유우야가 종이를 한 장 넘긴다.

 

유우야

중요한 문제죠. 지금 생각나는 번호 여섯 개를 불러주시겠어요? 한 자릿수로, 중복돼도 괜찮아요.

 

아멜리

네?

 

유우야

구독자 추첨에 쓰거든요.

 

아멜리가 턱을 괴고 고민하다가 고개를 든다.

 

아멜리

1, 3, 1, 4, 0, 9요.

 

유우야

감사합니다.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게 된다면 무슨 일을 가장 하고 싶은가요?

 

신이 반사판 옆에 서서 창밖을 내려다본다. 길에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아멜리

잘 모르겠네요. 한동안 쉬고 싶어요. 관심 있는 건 조향이에요.

 

유우야

다음에는 향수병에서 당신의 이름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이 다음은 잡지 구독자의 고민을 들어주는 특별 질문이 있어요.

 

아멜리

자신이 없는데… 어떤 질문이에요?

 

유우야

정말 소중한 선물을 받았어요. 이걸 어디에 보관하는 게 좋을까요? 잃어버리진 않을까 두려워요.

 

아멜리

그냥 들고다닐 수는 없는 거겠죠? 그런 거라면 저는 제 방의 서랍 안에 넣어둘 것 같네요.

 

유우야

가장 안전하니까?

 

유우야가 아멜리의 표정을 주의깊게 살핀다. 아멜리는 아까보다 긴장이 풀린 얼굴이다.

 

아멜리

잃어버릴 염려가 없죠.

 

유우야

마음에 드는 대답이네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각오, 즉 비전을 들려주시겠어요?

 

아멜리가 양손을 바깥쪽으로 펼치면서 입을 연다. 신이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본다.


 

* * *


 

"온다."

"몇 명?"

"일단 보이는 건 셋."

 

신은 창가에 서서 블라인드 사이를 벌리고 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친 아멜리가 인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 옆의 가로등, 건물 앞에 주차된 차 한 대, 마지막으로 길 건너편 좁은 골목의 쓰레기통 옆에 사람이 한 명씩 서있었다. 그들은 용의자를 감시하는 잠복경찰처럼 신과 유우야가 있는 건물을 주시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무장은?"

"지금으로선 확인 불가."

 

유우야는 인터뷰 답변을 적은 종이를 두 번 접어서 양복 주머니를 넣는 걸 마지막으로 사무실의 정리를 끝마쳤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신이 목격한 풍경을 확인하고는 걸음을 돌렸다.

 

"개미굴로 가자."

 

꿈에서는 개연성과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수많은 장치를 건설할 수 있었다. 타깃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그런 장치들은 투사체로부터 도망치는 데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특히나 문은 지나면 지나갈수록 그들을 쫓는 난폭한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매우 좋았다.

이 사무실은 4층에 있었지만 몇 개의 문과 복도를 지나면 지하의 비밀 통로로 이동할 수 있었고, 몇 개의 출구는 전혀 다른 장소에 위치한 집의 내부로 이어졌다. 그들은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투사체들을 사무실 건물 주변에 묶어놓고 그 부지를 빠져나갔다.

 

"거짓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더라. 인터뷰에서 애사심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던걸."

"회사가 좋아서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신도 아멜리의 대답에서 부정적인 기류를 읽어냈다. 아멜리는 팬포드 제약을 싫어한다기 보다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임무가 한층 더 난이도가 높아진 순간이었다. 유우야의 암시가 잘 먹혀들어갔다면 아멜리는 편안하게 여긴다고 대답한 조모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사이 두 사람은 아멜리 크루거의 집에 가서 그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뭔지 알아내야 했다.

 

단란한 가정집을 통해 나온 두 사람은 바로 샛길로 빠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 탓이다. 유우야는 길가에 배치해둔 차의 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신도 곧바로 조수석에 탔다. 그는 아직도 차가 필요하면 미리 세워둔 차를 타고 가면 되는 이 꿈 속의 세계가 별로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를 타야만 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점점 그들을 쫓아오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게 편리하기만 한 세계는 아니었다. 바로 그 점이 유우야가 신을 필요로 한 이유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아멜리에게 접촉하여 면대면으로 인터뷰까지 진행했는데도 투사체들의 공격성이 아직 이 정도에 머문다는 건, 다행히도 아멜리 크루거가 따로 투사체를 방비해두는 훈련을 받지는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건 회의의 초기 단계에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졌었다. 아멜리는 좋은 집안 출신은 아니었지만 팬포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기업이었고, 직원들에게도 꿈을 활용한 트레이닝을 시킨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투사체들은 시야에 오래 머물러있지 않으면 금세 이 허름한 차를 향한 관심을 꺼버렸다. 그래서 오히려 적당히 신호를 어기는 편이 그들의 관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여기야."

 

유우야가 길게 이어진 타운하우스의 어느 집 차고 앞에 차를 댔다. 그는 신과 함께 현관 앞까지 걸어가서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둘러보고는 능숙하게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밖에서는 준법시민처럼 굴었지만 꿈 속에서만은 무법자가 되었다. 물론 현실에서도 범죄자이긴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마치 집주인처럼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유우야는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안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현실과 동일하게 여기가 아멜리 크루거의 방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앞쪽으로 침대가 보였고, 시선을 돌리면 왼쪽에 책상이 있었다. 그는 공구 상자를 꺼내어 책상 옆면을 절단했다. 마침내 꺼낸 서랍의 바닥에 금고가 붙어 있었다.

 

"열려?"

"로케이터가 충실히 일해준다면. 어디 볼까."

 

유우야는 아까 아멜리에게 들은 숫자를 차례차례 다이얼로 맞췄다. 금고는 거짓말처럼 열렸다. 유우야가 금고를 열고 안에 있는 서류 봉투를 보란 듯이 꺼내서 보여준 다음 신에게 윙크했다. 신은 그의 수작질을 무시하고 내용물을 같이 보려는 듯 그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수기로 적힌 서류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이 유서에 나의 죄를 고백하려고 한다.


 

* * *


 

유우야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가 후방을 살피면서 핸들을 꺾는 동안 신은 곁눈질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유우야의 웃지 않는 얼굴을 이번에 처음 보았다. 유우야의 운전은 고민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시원시원했지만 뒤늦게 열린 그의 입에서는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1단계로는 부족해. 꿈이 너무 얕아."

 

신도 이미 아는 이야기였다. 사람의 무의식은 꿈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접근하기 쉬웠다. 유우야가 이런 말을 꺼내는 건 그들의 원래 계획, 꿈 속의 꿈, 그 안의 꿈까지 진입하겠다던 플랜이 시작부터 완전히 틀어진 것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방금 본 서류의 탓이 컸다.

 

두 사람은 아멜리 크루거의 비밀 금고에서 한 서류를 발견했다. 그 서류는 유서의 형식을 빌려 팬포드 제약의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자신은 얼마 전에 제이크 콜먼이 의도적으로 림보에 빠지는 환자들을 늘린 뒤, 그들을 영수면 상태, 즉 림보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약을 사람들에게 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았으며 그 뒤로 약을 만들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내용이었다. 유서는 그런 미래를 막기 위해 임상 실험이 끝난 약 샘플을 모두 챙겨서 도망칠 거라는 그의 다짐과 함께, 만에 하나 자신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이 문서가 세상에 공개되어 팬포드의 만행이 온 천하에 드러나길 바란다는 이야기로 끝맺어졌다.

 

실제로 아멜리의 집에 이런 유서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번 꿈속에서 그가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었던 비밀은 전부 그 서류에 적혀 있었다. 문제는 유우야의 말대로, 꿈이 너무 얕다는 점이었다.

 

"크루거가 치밀한 훈련을 받은 요원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덜컥 믿기는 어려워."

"아멜리 크루거가 머릿속으로 소설만 쓰는 망상증 환자면 우리만 곤란해지겠지."

"…하지만 아니라면, 선택을 해야 하고."

 

그 말에 신이 그의 옆얼굴을 조용히 쳐다봤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해코지하는 사람의 의뢰를 받을 생각은 없어."

거기까지 말한 뒤, 유우야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인적이 드문 도로라 신호에 걸렸는데도 주변에 차가 거의 없었다. 유우야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까지 피해를 입게 되겠지……."

"당신은 아니고?"

 

유우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신은 오히려 화살을 유우야의 방향으로 돌려버렸다.

 

"가지고 싶어 했잖아, 그 약이라는 거."

"이런 식으로는 아니야."

"……."

 

다시 신호가 바뀌고 유우야가 페달을 밟았다.

 

하기리 유우야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미 꿈 속에서 타인의 비밀을 도둑질하고 다니는 주제에, 꿈 속에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타인의 집 현관문을 따고 들어가면서도 자신의 고용주가 불의를 저지르고 있다면 그에게 거역하겠다는 것이다. 그자가 지금의 그에게 아마도 가장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심지어 이번 일을 무사히 완수하기만 하면 내어주겠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난 상관없어. 그렇게 해도."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만."

유우야는 그를 보다가 물었다.

"너는 왜 이 일을 받아들인 거야?"

 

신은 양손을 머리 뒤에 받치고 등을 뒤로 기댔다.

 

"말 안 해."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의 고개는 이제 운전석에서 완전히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유우야는 옆을 잠깐 봤다가 다시 앞을 보면서 운전을 했다.

 

신은 실존하지 않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에 있을 것처럼 생긴 서점, 악기점, 옷가게, …동굴. 도심을 본따 설계한 곳에 동굴이 있었다. 신이 눈을 크게 떴다. 그곳은 동굴이자 집이었다. 비밀이 있는 곳이었다.

 

"왜 그래?"

 

그는 빠르게 지나쳐버린 잔상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사이드 미러를 살폈다가 인상을 썼다. 그리고는 권총을 꺼내들고 창을 내렸다.

 

"투사체야."

 

신이 뒤쪽으로 총을 두 발 발사했다. 유우야가 혀를 차고는 좁은 길로 차를 틀었다.

 

그들은 무장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신과 유우야가 탄 차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강한 원망과 분노를 품은 듯이 쫓아오고 있었다. 신은 바이크를 타고 접근해오는 한 명의 머리를 날리고, 곧이어 손에 각목을 들고 고함을 지르는 남자를 향해 위협 사격을 했다. 유우야도 지그재그로 운전하면서 한 명을 차벽으로 쳐냈다. 신은 바이크로 아예 차를 들이박으려던 남자를 가까스로 쏘아 맞혔다. 적을 따돌리기는 했지만 슬슬 여유롭게 움직이는 것도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

"아멜리 크루거의?"

"할 수 있겠어?"

"뭐를."

 

유우야는 차의 속도를 점점 높이면서 말했다.

 

"나를 지키는 거."

"당신만 혼자 보내지는 않을 거야."

"무슨……."

 

유우야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구역을 피하기 위해 차를 돌리다가 잠깐 당황한 얼굴로 신을 쳐다봤다. 그는 몰랐지만 사카키바라 신이야말로 두 번째 변수였다. 어디서 이런 팀원들만 모아왔는지, 그는 꿈 안으로 들어가면서 마지막 꿈에선 혼자 해결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그의 가드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유우야는 한쪽 손으로 미간을 눌렀다.

 

"그래, 그럼 내가 남을 테니까…."

"반대도 마찬가지야. 위장 같은 건 내 분야가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이대로 꿈에서 깨서 임무를 여기서 중단하고 싶은 거야?"

"아니."

 

유우야는 조금 지친 목소리였지만 신은 오히려 차분했다. 그는 등 뒤를 살피면서 말했다.

 

"직접 해보니까 한 명은 너무 위험해. 다른 방법 뭐 없어?"

"다른 방법 같은 건…."

 

그런 건 없다. 드림 머신을 계속 모니터링하고 킥을 유도하는 사람 없이 꿈 속의 꿈으로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그 사이에 투사체들은 잠든 사람들을 찾아내 갈기갈기 찢어내고 말 것이다. 그럼 강제로 깨어나게 된다. 아주 결정적인 순간을 앞두고 있었다고 한들, 꿈은 사정을 봐주지 않을 터였다.

이때 유우야는 뜬금없이 신이 사람을 향해 망설임 없이 총을 쏘던 순간을 떠올렸다. 훈련을 받은 걸까? 그는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걸까. 적어도 위험과 동떨어진 평화롭기만 한 삶을 살아오지 않은 건 분명했다. 그랬다면 이런 일을 자신과 함께 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우야는 잠깐 말이 없었다.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꿈이 하나 더 있어."

"무슨…. 조력자를 나한테 숨긴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분명 이 드림 머신의 튜브에 연결된 사람은 아멜리 크루거와 사카키바라 신, 하기리 유우야, 이렇게 세 명이었다. 유우야는 내키지 않는 투로 이야기했다.

 

"투사체의 꿈에도 들어갈 수 있어."

"그건 빈 껍데기라며."

"강력한 사념이 만들어낸 투사체는 달라."

"그럼 됐네. 안내해."

 

총을 들고 단호하게 말하는 신은 그의 전담 경호원이 아니라 갱단 같았다. 도로 저 앞에 있는 정원이 딸린 아늑한 집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꿈 밖에서 침입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본래 꿈 속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거짓이자 허상이었다. 그들은 의식을 공유하는 하나의 유기체를 잘게 나눠둔 거나 다름없었다. 오직 무의식 속에 침투한 이물질을 몰아내기 위해 행동하는 보초 기계병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들에게는 인생도 자아도 없다. 꿈도 없다.

 

'하지만 하루나는 달라.'

 

그는 꿈을 꾸면 어디에서나 익숙한 병원 건물을 지나친다고 했다. 그의 옛 동료가 입원해있는 병원이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오는 것이다. 그가 어느 날 혼자 도달한 꿈 속에서 병원의 계단을 올라 1인실 병동의 침대 옆에 앉아있다가 드림 머신의 락을 푼 건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 뒤로 그는 몇 번이고 츠즈노 하루나의 꿈에 들락날락했다고 한다. 림보에 빠져있는 사람의 정신이라는 게 다 뭔지, 그는 하루나의 꿈 안에 들어가면 그곳에는 투사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전 단계의 꿈에서 투사체에게 쫓기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같은 투사체로 인식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지만 어디까지나 추론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가 정론이고 어디서부터가 예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과거에 있었던 일에 시달리고 있었고 하루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꺼렸다.

 

"대신에 이건 너도 명심해야 해."

"또 뭔데."

 

1인실의 새하얀 병상 위에는 아멜리 크루거와 긴 분홍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해둔 한 여자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유우야는 자신의 예전 동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버렸다.

 

"투사체는 없어. 이번 꿈은 안전할 거야. 대신에…."

이번만은 신도 끈기 있게 기다렸다.

"킥을 쓰는 건 불가능해."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신이 말을 받았다.

 

"깨어나기 위해서는 한 번 죽어야 해. 괜찮겠어?"

 

유우야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신은 그가 정말 자신을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불신하기에 그렇게 바라보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언젠가의 그의 말을 인용했다.

 

"꿈을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

 

유우야는 잠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봤지만, 그의 말에 별 말 않고 기계의 세팅을 조작했다.

신은 유우야가 보조 침대를 꺼낸 다음 의식이 없는 하루나(의 모습을 한 투사체)의 팔에 바늘을 꽂고, 뒤이어 아멜리 크루거의 팔의 혈관을 찾는 걸 보면서 물었다.

 

"그럼 꿈 내용도 정해져있나?"

"설계는 등록했어. 하지만 좀 수정할 거야."

"어떤 식으로?"

"안전한 장소에 보다 걸맞게."

 

유우야의 말이 끝나는 때가 그가 기계 중앙을 누르는 순간이었다. 그는 몸을 뉘이고 눈을 감았다. 병원 밖에서 점점 몸집을 불리며 커져가던 소란이 거짓말처럼 일순에 종식되었다.

꿈은 다시 평화로워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 *


 

덜컹거리는 소리에 의식이 깨어났다.

 

신과 유우야는 열차에 타고 있었다. 주변에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 어딘가에 아멜리 크루거가 있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있는 칸에는 없었다.

"곧 역에 도착할 거야. 그럼 내리자."

"어."

 

본디 열차는 꿈 설계에 환영받는 구조가 아니었다. 투사체들로부터 도망치기에는 너무 공간이 한정적이고 발각되기 쉽기 때문이다. 열차칸을 복잡하게 서로 이어놓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기는 아니었다. 열차는 물론이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도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도시인데도 그랬다. 원래 2단계로 예정해둔 꿈은 훨씬 더 복잡한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1단계와 흡사한 장소를 지나고 있었다. 꿈의 특이성을 고려한 유우야의 솜씨였다.

 

"열차가 멈추면 자연스럽게 목적지에 다 와간다는 기분이 들겠지. 좀 외롭기는 해도 말이야."

 

그는 다시 농담을 되찾았다. 옅게 웃고 있기까지 했다. 신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모나게 말했다.

 

"당신 여자친구만 하겠어."

"하루나는 내 여자친구가 아니야."

"어찌 됐건. 당신이 이제는 손님들까지 줄줄이 데리고 들어오는데 순순히 환영해주겠어?"

"하루나라면 그럴걸."

 

신은 됐다는 의사 표현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일어나서 그들이 있는 열차 칸이나 자세히 둘러보기로 했다. 별일을 다 겪다가 오랜만에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오히려 좀이 쑤셨다. 좌석을 살피는 신의 등 뒤로 유우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림보로 마중을 나간 적이 있어. 아니, 꽤 자주."

 

그의 말에 신이 유우야를 돌아봤지만, 유우야는 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맨 앞자리, 앞에는 하얀 벽이 있다.

 

"그래서?"

"하루나를 설득했지. 같이 밖으로 나가자고."

"같이 죽자고?"

"응."

"실패했나봐."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거든."

"그냥 쏴버리지 그랬어."

 

신은 태연하게 말했다.

 

"깨어나면 금세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그 여자도 당신한테 고마워했을걸."

"……."

 

유우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함께 눈을 뜨고 깨어나지 못했던 과거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신이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는데 안내 방송이 울렸다. 저희 열차는 곧 도착할 예정입니다. 어디로? 그건 말해주지 않았다.

불친절한 안내 방송이었다.


 

* * *


 

"좀 이상하네."

 

유우야는 텅 빈 거리를 걸으면서 말했다. 신은 간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분홍색 꽃잎을 손으로 치우면서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들어보니 유우야는 아까 두 사람이 열차의 차창을 통해 본 것처럼 일부러 꿈을 1단계와 유사한 풍경으로 설계했다고 했다. 구조는 다를지언정 보이는 모습만은 방금까지 있던 그곳과 다른 점이 거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이 걷는 길은 가는 곳마다 꽃과 나무로 가득했다. 고층 건물의 꼭대기까지도 담쟁이 넝쿨이 자라 있었다. 미니어쳐 도시 위에 꽃과 이파리를 한껏 부은 모양새였다. 다만 이상하지 않냐고 물어볼 사람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일은 유우야도 처음 겪는 모양이었다. 신은 머리카락에 붙은 벚꽃잎을 털어내면서 물었다.

 

"다시 그 집에 가려는 거지?"

"응. 대신에 이번에는 직전에선 진입하지 않았던 그 집으로 가는 거야."

"그래."

 

투사체가 없으니 위험도 없었다. 아멜리보다 늦으면 좀 곤란해지겠지만 목적이 정보 확인으로 치우치게 된 지금은 아멜리의 위치나 의사가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보다도 우선 아멜리 크루거가 진실로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걸으면서 아멜리와 했던 인터뷰와 그의 금고에 대한 대화를 나눴고, 나중에는 유우야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떻게 하루나와 해리슨과 처음 만났었는지, 처음 꿈에 들어갔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신이 돌려주듯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유우야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었다.

신은 텅 비어버린 도시의 풍경을 보면서 걸었다. 모든 곳이 정교했지만 건물과 블록 사이에 뿌리 내린 들꽃처럼 곳곳에서 자라난 꽃과 덤불이 도시를 이질적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드림 머신까지 개발해가며 인간의 꿈을 이용하려 들었지만, 여전히 꿈에 관한 많은 사실은 우주처럼 밝혀지지 않은 미지에 감싸여 있었다. 꿈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와 맞닥뜨려야 했다.

 

"꿈이라고 해봤자 별거 아니네."

"이런. 지금도 꿈 속에 들어와있으면서 그런 말 하기야~?"

"그렇잖아. 마음대로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신은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메아리처럼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동굴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지만.

 

"이 안에서는 뭐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마음에 들면 아주 여기서 살지 그래."

"그건 무리야. 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누가 그렇게 당신을 기다리는데?"

 

그의 말에 유우야가 웃었다.

 

"비밀."

"그래, 됐어."

"아니면 너?"

"이건 또 뭔 헛소리야…."

"요트 타러 가기로 약속했잖아. 그런데 나 혼자 안 깨어나면 신이 서운해서 어떡해."

"한 적 없어. 그리고 안 가."

"하하."

 

이번에도 유우야가 문을 따주었다. 신은 유우야가 나서서 뭘 할 때마다 그냥 기다렸다. 그가 어린 아이가 쓰는 것 같은 방을 찾아서 장난감 사이에서 작은 금고를 발견할 때까지도 신은 가만히 따라가기만 했다.

 

"……."

"어때?"

 

그 순간, 신은 종이가 아니라 유우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차가운 분노가 서려 있었다.

 

"…제이크 콜먼이야. 하루나가 그때 쓴 약도, 그 자식이…."

"그놈이 한 거라고?"

"명단에 그때 약을 건네준 남자의 이름이 있어. 잠깐 기다려봐, 이 뒷장에 적힌 게 약의 조제법 같…"

 

그때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그건 포탄이 터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무거운 벽에 금이 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무튼 사람을 본능적인 공포로 내모는 비명 같은 굉음이었다. 신은 이 소리를 알았다. 그러나 정작 움직인 건 유우야였다. 그는 달려들어 신을 감쌌다. 아마 함께 피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기리 유우야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파편에 부딪쳤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신은 본능적으로 그의 기절이 일시적인 증상이 아니라 완전한 사망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우야는 운이 나빴고 신도 만만치 않았다. 끝내 사망한 사람과 사람이 죽는 걸 지켜만 봐야 하는 사람 중에 어느 쪽이 더 불운한 걸까?

 

신은 자신의 품에 쓰러져 꺼져가는 생명을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천장이 무너진 거지? 나 때문에? 아니면. 신은 피에 젖은 유우야의 몸을 안고 총을 꺼냈다. 임무는 실패다. 어차피 서류를 읽은 하기리 유우야의 표정으로 보건대 이번 프로젝트는 여기서 중단될 운명이었다. 그럼 남은 건 깨어나는 것뿐이다. 사실 꿈에서 사람이 죽는 일은 그렇게 심각한 사건은 아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영화속 주인공도 텔레비전을 끄면 그대로 사라진다. 꿈에서 깨면 그 모든 일들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죽음이야말로 꿈에서 깨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던 신은 문득 유우야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서류에 눈길이 갔다. 유우야의 말대로라면 이건 림보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을 깨우는 약의 제조법이었다. 신은 서류를 쥔 그의 손을 잡아들었다. 정확히는 못 외워도, 간단하게라면….

 

"…?"

 

그런데 유우야의 손목에 채워진 바이탈 시계의 수치가 이상했다. 꿈에서 깨어났다면 맨 아래칸은 수치의 변동 없이 0으로 일정해야 하는데 유우야의 값은 오히려 높은 폭으로 날뛰고 있었다. 이건 림보에 빠진 사람들에게 쉽게 관측되는 수치였다. 하지만, 여기서 죽으면 꿈에서 깨어나는 게 아니었나?

 

신은 길게 망설이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명확했다. 다만 그는 경종을 울려대는 불길한 예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류 내용을 암기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대신에, 그를 안은 채로 자신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예상이 맞다면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 * *


 

바닷물이 신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온몸이 바닷물에 완전히 젖어있었다. 파도가 그를 상냥하게 어루만졌지만 그에게는 전혀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한없이 처지고 무거웠다. 그는 젖은 모래를 짚고 일어나서 몇 번 기침을 했다. 입 안에 고인 바닷물을 뱉어냈는데도 입 안에 소금기가 남아서 목이 탔다.

 

"어서와."

 

신이 두 손가락으로 눈가의 물기를 닦아내는데, 가까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앞에 서있는 건 익숙한 여자였다. 그는 꿈 속의 병실에서 눈을 감고 깨어나지 못하던 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자와 만난 적 있었다. 그걸 만났다고 해도 된다면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병실에서와는 다르게 환자복이 아니라 가을에나 입을 것 같은 코트 차림으로, 자신의 두 발로 제대로 서있었다. 신은 미간을 찡그렸다.

 

"츠즈노 하루나?"

"반가워."

"넌 가짜야?"

 

하루나는 그 말을 듣더니 쿡쿡 웃었다.

 

"그게 중요해?"

"별로."

 

생각해보니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츠즈노 하루나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여기서 하루나가 어떤 대답을 한들 믿을 수도 없었다. 어떤 사실들은 꿈속에서는 영원히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 이 세계의 불편한 점들 중 하나다.

신은 하루나를 거기 그냥 둔 채로 해안가를 걸었다. 따라오지 마, 그렇게 못박고 걷자 하루나도 그를 쫓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끝도 없이 펼쳐진 해안절벽은 아무도 이 너머로 보내주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선 거대한 장벽 같았고 아무리 걸어도 통로가 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처음 눈을 떴던 곳에서 다시 길을 찾아보기로 하고 돌아왔을 때, 하루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네가 뭘 찾는지 알아."

"내가 뭘 찾는데?"

"유우야는 여기에 있어."

 

그리고 하루나는 여기에 있었다.

 

그는 따라오라는 듯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신은 바람에 흔들리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 하기리 유우야가 여기 있다면 왜 츠즈노 하루나는 여기 있는 걸까? 그것도 자신의 길 안내를 해주고, 그 전까지는 파도 치는 해변에 서서 기다리기만 하면서 말이다. 이건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는 늘 꿈을 경계했다. 특히나 림보 안에서는 아무것도 믿지 않으려 했다. 하루나는 잠시 뒤를 돌아봤다가 신과 눈이 마주치자 말했다.

 

"하지만 난 만날 수 없어."

"왜?"

 

그 남자, 당신을 보고 싶어 하던데. 그러나 신은 그의 심정을 직접 전해주지는 않았다. 이유는 많았다. 자신에게는 그렇게 해줄 의리가 없기도 했다.

 

"나를 보면 미안해할 거야. 그리고 헤어지기 싫어 하겠지. 그러면 곤란한걸."

 

신은 츠즈노 하루나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그는 정말 유우야가 말하는 것처럼 상냥한 사람일 수도 있었고, 사고를 겪은 유우야가 아름답게 미화했을 뿐 실제로는 보다 비겁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여기에 선 츠즈노 하루나는 하기리 유우야가 만들어낸 환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림보라는 공간에서는 타인의 정신과 이어질 수 있는 건지도 몰랐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신의 앞에서 걷고 있는 여자는 유우야의 마음을 맑은 강물 아래를 내려다보듯 훤히 볼 줄 아는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그래서 신은 생각난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그 정도로 그 남자를 생각하면 그냥 죽어주지 그래."

"아하하."

 

하루나는 그의 말에 그냥 웃었다.

 

"그건 또 싫어?"

"신은 유우야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거기서 대화는 끝났다. 신은 더 대꾸하지 않았고 하루나도 묻지 않았다. 의문은 여전했지만 두 번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투사체에 불과하다면 대화는 무의미하다. 정신 세계의 구조가 그렇다. 조잡한 사탕발림에 넘어가는 사람들만이 꿈속에 갇힌다. 간절히 바라도 가질 수 없는 것을 소망할 때가 아니라면 꿈에 그토록 목을 맬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 사이를 지나가면 돼. 앞으로 쭉 가다가, 초록 지붕이 나오면 왼쪽으로 꺾어. 두 번째 집이야. 문패를 봐야 해."

 

그는 하루나에게 당신은, 이라고 묻지 않았다. 하루나는 뒤에 남았다. 신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안내해준 대로 가기 싫은 반항심도 있었지만 이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도 없었다. 한 번 속아준다고 거대한 패착을 맞는 세상도 아니었다. 가는 동안 신은 오차 없이 설계된 계획 도시 같은 거리를 지나면서 이곳을 지었을 사람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한 개인이 이 모든 것들을 세웠다고 하면 감탄이 나올 만도 하지만, 신은 오히려 마음이 급해져 걸음을 서둘렀다.

 

도착한 곳은 작은 집 앞이었다. 하기리羽切, 신은 이 문패에 적힌 성씨를 '하네기리'라고 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이름을 불러보아도 조용하기만 했다. 이럴 줄 알았어. 신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 다음에는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게 나을까 생각하면서 안을 둘러보는 동안, 예스러운 집안의 어떤 물건도 그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했다. 특히나 서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유독 시선이 가는 책이 한 권 있었다. 자세히 보면 위 아래 은색 박으로 테두리 처리가 된 수많은 양장본 가운데에서 한 권만 묘하게 금빛을 띠었다. 유심히 살피지 않고 지나쳤다면 알아보기 힘들었을 정도의 사소한 차이였다.

 

그는 책을 꺼내들었다. 책 안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수백 장의 종이 페이지가 아닌 금고가 붙어 있었다. 신은 다이얼을 돌리고 안에 있던 봉투를 꺼냈다.

 

새하얀 봉투는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는지 중간이 불룩했다. 신은 봉투를 보다가 입구의 양쪽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오므렸다, 그리고…….


 

* * *


 

"여기서 나가고 싶어?"

 

테이블에 앉은 유우야는 태평하기만 했다. 그는 갓 구워진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면서 말했다. 나이프에 눌려 넓게 발린 버터가 토스트의 온기를 만나 빵 위에서 녹았다. 고소한 냄새가 났지만 신은 그쪽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는 유우야의 얼굴과 목소리에서 오래된 나이테의 흔적따위를 찾으려 애썼다. 할 수 있는 한 빨리 그를 뒤쫓아 왔지만 그 사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신을 초조하게 했다. 그래도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여기가 꿈이라는 사실을 아직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이러고 있는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는 당신은."

"그야 물론 나가고 싶지. 햄 샌드위치 먹을래?"

"안 먹어…."

"아쉽네."

 

유우야는 토스트를 네모반듯하게 접었다. 그는 접시 위에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중앙에 핀을 꽂았다. 신은 여전히 눈빛으로 그를 독촉하고 있었고 유우야는 그의 시선을 모른체 하지 않았다.

 

"여기는 안전해. 위험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지."

 

커다란 거실 창 바깥으로 멀리 바다가 내다보였다. 집은 바다보다 훨씬 위쪽에 위치해 있어, 파도 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데도 철썩, 하는 소리가 여기까지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만큼 세찬 파도였다. 유우야가 떠밀려 오고, 신이 눈을 떴던 곳이다. 신은 그의 말에 혜성처럼 그동안 꺼림칙하게 느끼던 의문을 떠올렸다.

 

"당신….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어?"

"이렇게라니?"

"림보에 빠지게 될 거라는 거."

 

유우야는 양손을 모으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그는 이 집에 몹시 잘 어울리는 가구 같았다. 마치 주인이 공들여 산 인테리어의 일부처럼 집과 어우러졌다.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야. 하지만 불안 요소가 많다고 생각했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현상이 관측됐으니까."

"그래서 그딴 식으로 군 거야?"

 

그는 신의 목소리에서 노기를 감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도를 굽히지도 않았다.

 

"네가 혼자 림보에 빠지게 둘 수는 없었어. 여긴 정말 아무것도 없거든. 사실 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거기까지 듣자 신도 더 이상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유우야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유우야는 그를 올려다보면서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쏘려고?"

"짜증나서."

 

유우야는 오른손으로 총구를 천천히 감쌌다. 처음에는 엄지 손가락을 붙였고, 그 뒤에는 한 손가락씩 아르페지오로 화음을 누르듯 순서대로 총신 위에 감았다. 그러나 총을 치우거나 빼앗지 않았다. 공연히 신만 손에 힘을 더 줘야했다. 그는 오히려 총구에 이마를 붙이고 눈을 감는 유우야를 보면서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우야는 늘 자신이 알기 쉬운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옆에서 보고 있으면 이만큼 복잡한 사람이 또 없었다.

 

"이래도 깰 수 없다면?"

"뭐?"

"그때도 이런 식이었어. 우리는 원치 않게 림보에 떨어졌고, 이곳에 오래 있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지. 나도 하루나도 림보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고."

 

유우야는 계속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같이 죽었어."

"…당신만 깨어난 거고?"

"너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넌 아직 어리니까…."

 

유우야가 총을 쥔 손을 떨어뜨리듯 거두었다.

 

"그래도,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정말 미안해."

 

유우야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신도 팔을 내렸다. 이제 권총이 드리우던 그림자가 물러난 유우야의 얼굴에 깊이 파고든 감정이 뭔지 신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죄책감과 체념이었다. 유우야는 이 세계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지만 그런 장소에 누군가를 홀로 두고 나가버린 전적이 있었고, 오늘로 새로운 시험을 치러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는 그런 일을 두 번이나 겪고 싶지 않았지만 남에게 겪게 하기도 싫어 했다. 원체 도박을 싫어하는 남자다.

 

"그때 네가 그냥 쏘라고 했었지. 사실은 해봤어. 하루나가 있는 이 밑바닥까지 내려와서 몇 번이고 죽여봤지."

"그렇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깨어나지 않았어."

 

유우야는 이제 턱을 괴고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충분해. 좀 더 느긋하게 고민해도 괜찮아. 어차피 밖에서는 순간이야. 나가서 해야 하는 일은 많지만, 어차피 나갈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하니까, 차라리 그 전에……."

 

현실에서의 잠깐이 림보 안에서는 몇 년이나 된다는 사실이 반대로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는 거꾸로 셈했다. 좀 더 여기서 고민해보면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오랜 고민이라고 해봤자 바깥 세상의 계산법이라면 한낱 보잘 것 없는 해변의 조약돌 한 개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서두르지 않았고 도전을 계속 미뤘다. 스스로도 반기지 않았던 불편한 휴가인 셈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당신이 바라던 게 없잖아."

그의 말에 유우야가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이런 걸 위해 여기에 온 게 아니야……."

"네가 어떻게 알아."

 

유우야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신은 그의 눈을 계속 쳐다보았다. 그가 시선을 돌릴 수 없도록.

 

"그야… 당신이 이러지 않게 하려고 여기에 온 거니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의뢰를 받았어."

 

그의 말에 유우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양팔을 테이블에 올리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아, 그래. 내가 네 타깃이었나? 이건 처음 알았네. 뭘 하래? V 기업의 기밀인가, 아니면 추출 기술을 빼내오라고 시키던? 뭐가 필요했어?"

 

유우야의 비아냥에도 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응."

"도와주라고."

"……."

 

적어도 그 말은 신의 입에서 나올지도 모른다고 유우야가 상정한 수많은 예상 답변 리스트에 없던 말이었다. 그래서 유우야는 잠깐 동안 그의 말의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제야 그는 사카키바라 신이 그토록 자신의 행동에 짜증을 내면서도 늘 마지막에는 반대하지 않고 함께 해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이라면 유우야도 꿈쩍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신의 눈에서 자신을 향한 염려를 훔쳐보았다. 그건 타깃을 향한 알량한 동정 같은 게 아니었다. 기실 그랬더라면, 그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곳까지 와서 그에게 화내줄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유우야는 망설였다. 그에게 뭘 물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뭐라고 물어도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그에게 손을 뻗었다.

신은 아무 말 없이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당겼다. 일어선 유우야와 신의 시선이 일직선상에서 만났다. 살아나기 위해선,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번 죽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절벽이다.

권총 두 자루를 집에 두고도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었고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웃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도 손은 놓지 않았다.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맞잡은 손은 약속이었다. 당신을 두고 가지 않을 거라고, 여기에 혼자 남지는 않을 거라고 지금만큼은 그렇게 생각했다.

 

유우야는 발밑의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불확실한 건 싫어."

 

그의 중얼거림을 들으면서 신은 이 손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곳이 없는 세계지만 그는 유우야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몸이 기울어졌다. 어딘가에서 메아리가 들렸지만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 * *


 

유우야가 눈을 떴다. 그의 손은 비어있었지만 텅 빈 손을 보고 있자 금세 누군가의 손이 다가와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신이었다.

 

"아…."

 

찰나에 수많은 생각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림보는 먼 옛날 잠깐 보았던 오래된 꿈처럼 느껴졌다. 그보다도 임무의 실패가 그의 피부에 더 가깝게 다가왔다. 그러나 더 이상 프로젝트를 이어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우야는 제이크 콜먼 같은 남자에게 협조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게 되면 하루나를 깨울 방법과도 멀어져야만 했다.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희망은 손끝이 닿을 듯 말 듯한 곳에 머무르면서 그를 괴롭혔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유우야!"

 

그가 다그치듯 이름을 부르자 유우야가 고개를 들었다. 신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유우야의 손에서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서류 다발이었다.

 

두 사람은 아직 꿈속에 있었다. 림보 안에서 사망하면 원래 현실에서 바로 깨어나는 게 학계의 정설이자 유우야가 숱하게 해온 정석적인 경험이었지만, 실험적인 도전 안에서 몇 가지가 꼬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중요한 건 아직 파악되지 않은 꿈의 알고리즘보다도 서류에 적힌 줄글이었다. 유우야가 급하게 종이를 주워들고 그곳에 적힌 문장들을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포인트맨의 자질이란 토씨 하나 빼뜨리지 않고 외는 집요한 기억력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됐어."

 

유우야가 종잇장을 내리면서 신을 바라본 그 순간, 동시에 집의 현관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현관으로 아멜리 크루거가 들어왔다. 그는 지붕의 무너진 잔해 앞에 서있는 두 사람을 보고 놀란 기색이었지만 침착하게 그들을 향해 말을 건넸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이런 순간은 늘 하기리 유우야의 담당이다. 점점 부서져가는 꿈의 세계와는 대조적으로 그가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찾아가겠습니다."


 

* * *


 

유우야는 안을 깨끗하게 비운 라이터를 한 손으로 들었다 다시 내려놓고는 옆의 종이에 연필로 무언가를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처음 몇 개의 선은 종이 위를 베듯이 길게 사선으로 그었다면, 그 다음은 유명한 영화 속 주인공의 이마 흉터처럼 중간에서 어긋나게 이어서 그었다. 그리고는 조각칼을 집어들고 네모난 황동판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는 토템을 새로 만들고 있었다. 이제 유우야의 손목에는 초침이 멈춘 시계 대신 멀쩡하게 움직이는 손목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그는 토템에 있어서는 작은 오차도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요 며칠은 계속 이 작업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유우야는 조각칼을 내려놓고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곧 기다리던 사람이 이 방으로 들어올 것이다.

 

"왔어?"

 

신은 어깨에 커다란 더플백을 매고 나타났다. 어디 산행이라도 가는 듯한 차림이었지만 그게 사카키바라 신이 지닌 짐의 전부였다. 그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소파 위에 가방을 얹고 자신도 앉았다. 신은 유우야의 책상 위에 놓인 공구들을 보고 무심코 주머니 안에 손을 넣고 자그마한 나침반을 손 안에서 굴렸다. 유우야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구태여 한 번 더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

"됐어, 굳이…."

 

이곳은 처음 유우야가 그를 시험했을 때와 같은 장소였지만 지금은 그때와 많은 게 달라졌다. 그들은 두 번째 동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이 기묘한 협력의 끝이 언제일지 확실하게 정해두지 않았다. 사카키바라 신이 받은 의뢰의 기한은 언제까지일까?

 

어떤 비밀들은 영원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비밀이 자물쇠를 열지 못한 사람을 파멸시킬 만큼 치명적인 것도 아니다.


 

* * *


 

Post-credits Scene

 

코팅된 선글라스가 작열하는 태양의 맹공격을 그나마 막아주었다. 유우야는 같은 이유로 신에게 선글라스를 권했지만 그는 유우야쪽을 보더니 필요 없다는 말만 돌려주었다. 애초에 왜 선글라스가 두 개나 있는 거야. 유우야는 아쉬워하면서 손을 거두고는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탄 새하얀 요트가 푸른 바다를 시원하게 가르고 움직였다.

 

"팬포드 녀석들, 귀찮게 구네."

"그런 대기업은 항상 끈덕지게 물고 늘어진다니까. 요즘은 그러면 인기 없는데 말이야."

"됐어. 크루거는 항구에 가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거 맞아?"

"사람을 한 번 통해야 해."

 

피나 콜라다 위에 꽂힌 파인애플과 체리를 바라보던 유우야가 퍼뜩 놀란 얼굴로 신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우리, 여기 어떻게 왔더라."

 

신은 어이 없어 하는 얼굴로 유우야를 바라보더니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면서 대답했다.

 

"야, 장난치지 마. 표 끊고 왔잖아."

 

그의 대답에 유우야가 웃었다. 파도 소리도 경쾌하게 두 사람을 환영하고 있었다. 이윽고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수평선 너머로 육지의 일부가 보였다. 유우야가 그쪽을 가리키며 무어라 말했다. 이번 항해의 종착지는 카프리 섬이었다. 미풍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흐트러뜨렸다. 바람이 새로운 여행의 시작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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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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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정보

출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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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키바라 신

Sakakibara Shin

커망, 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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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리 유우야

Hagiri Yuu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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