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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윅: 리로드

John Wick: Chapter 2

 업계 최고의 킬러 사마계. 사랑하는 남자에 의해 조직에게 쫓긴 그는 복수를 위해 상하이를 찾는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던 건 맞춤 무기를 제작하는 다예사.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것만이 아냐.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공공의 적을 쫓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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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 122분

액션 · 느와르 · 스릴러

 “다예사가 있나.”

 

 수백 종류의 마른 찻잎이 질 좋은 종이와 자기에 담겨 제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고급 다관에서 다예사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나 계는 구태여 이름도 언급하지 않고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을 한 노인에게서 다예사를 찾았다. 노인의 가려 판단하는 날카로운 눈빛도 잠시, 계가 금화 한 닢을 꺼내 보이자 노인은 정중하게 인사하며 다관의 가장 안쪽으로 향하는 장지문을 소리 없이 열며 대답했다. 오늘 좋은 차가 들어왔다는 일상적인 대화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즐겁고 평온한 투였다.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관의 깊은 안, 행여 실수로라도 헤매 들어올 수 없도록 신발 아래 바닥마다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진 은밀한 다실은 계가 감각을 곤두세워도 희미하게밖에 남지 않은 잔향만이 인기척을 대신하고 있었다. 과연. 그토록 유명하다는 소문이 헛것만은 아닌가 보아. 계는 타인의 말에 좌지우지 흔들리지 않고 겪어보지 않은 일에 쉬이 넘어가지 않는 인간상이라, 다관의 다예사가 그리 실력이 좋다는 소문이 자자했어도 변변치 않은 자라면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무기는 곧 죽이는 자의 수족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내 몸을 별것도 아닌 자에게 맡기겠는가?

 

 마지막 장지문을 열자 은은하게 퍼지는 벽라춘이 향긋했다.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괜히 향료를 부어 좋은 차를 엉망으로 만들지 않은 자연적인 과일 향이 과연 사람 잡는 향기라고 전해질 법했다. 이 다예사는 손님이 머무는 법을 알고 손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하니 흥미를 끌 만한 차의 향을 일부러 피워올려 발걸음을 붙잡고 고개를 안쪽으로 향하게 만든다. 계는 그것만으로도 이 조용한 다예사의 성격을 알아챘다. 내숭을 잘 부리고 음흉하군. 여우 같은 놈이다. 향긋항 향내가 밴 백색의 긴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부드럽게 문 안쪽에서 일렁거렸다. 주름 하나 지지 않게 차려입은 옷자락을 곱게 갈무려 인사하는 예의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찰귀.”

 “나를 아나.”

 “방문하신 손님의 성함도 몰라서야 어찌 다관 일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찻잎에 대한 조예가 상당하시다고 들었습니다. 허투루 대접할 수는 없지요.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마친 다예사는 그린 듯한 미소로 사마계를 맞이했다. 이 쪽으로. 너무나 자연스레 나찰귀의 곁으로 소리 없이 다가가 옆에 섰으나 사마계는 막지 않았다. 어디까지 자신의 오감을 넘어서나 궁금해서기도 했지만, 간살부리는 이 남자의 속내를 파헤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쪽 구석에서 치고 올라왔다. 훌륭한 실력을 가진 이는 좋아한다. 하물며 지금처럼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할 때는 더더욱. 계가 뿌리치지 않자 다예사는 더욱 가까이 붙어 하늘거리고 풍성하게 차려입은 전통 의복 소매를 살짝 걷으며 계의 손목을 받치듯 들어 물었다. 오늘은 어떤 차를 찾으시는지요? 남들보다 체온이 높은지 따뜻한 숨결이 김도 남기지 않고 나찰의 심장에 독니를 세워 파고든다. 무기를 안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습관과 성격과 호불호와 마음 전부를 안다는 것. 안다는 것은 곧 손댈 수 있다는 것. 다예사는 타인의 틈새를 파고들어 선을 재고 원하는 답을 내어놓는 일에 능했다. 그러니 당신의 마음도 알고 싶어.

 

 “그렇지. 흐음……. 잔향이 오래 가는 것이 좋아. 허나 예의 차리는 자리 따위 가지 않는다. 갑갑한 것은 사절이야.”

“하하하,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바람에 흩어지는 옅은 안개처럼 다예사의 발걸음이 가벼워지더니 천자락이 스치며 선반에서 검은 칠 상자 하나가 탁자 위로 올라왔다. 천으로 몇 겹이나 싸여 있었으나 단박에 느껴지는 금속 냄새에 계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총기는 이런 식으로 보관하지 않는다. 허면 나올 것은.

 

 “승표입니다. 날은 가볍게 세운 단도가 아니라 낫으로 되어있지요. 멀리 던져 감아 끌어당기는 것도 편할 뿐더러, 도망치기 쉽지 않으니 마음에 드실 겁니다.”

 

 계는 다예사가 꺼낸 묵직한 승표를 들며 한 차례 휘둘렀다. 오로지 손과 주먹으로만 지금껏 살아남은 암살자가 바로 나찰귀 아닌가. 섣불리 현대식 무기를 꺼내지 않은 것에서 가산점이 있었지만 겨우 단단히 꼬아 만든 밧줄 따위로 만족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그런 계의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다예사는 소리내 웃으며 굳은살 박힌 흰 손으로 밧줄이 늘어진 어깨부터 등까지 아주 가볍게 훑어내려 줄을 걷어냈다. 옷감 위로 흔적조차 남지 않는 터치였으나 도저히 아무런 속셈도 없는 손길이라고 포장할 수조차 없어 계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내어준 만큼만 베푼다. 만족할 만한 것을 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야. 다예사는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답했다. 귀의 마음은 몰아치는 파도와 같으니 감히 줄로는 매어둘 수 없겠지요. 이것이 더 마음에 드실 겁니다. 차르륵, 무겁고 굵은 쇠사슬이 줄 대신 달렸다. 쇠 냄새와 윤활유 냄새가 섬세한 차향을 덮기 시작해 다예사는 물 올린 불 아래로 장작을 하나 더 던져넣었다. 더 많은 찻물이 필요했다.

 

 “석출경화한 스테인리스강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끊을 수 없고, 제아무리 젖어도 녹이 슬지 않지요. 단점이라면 아주, 무겁습니다.”

 “오히려 감는 맛이 있어 좋겠군. 무게까지 부러 골랐지.”

 “하하, 손님께 딱 맞는 차종을 권하는 것이 제 일이라.”

 “허면 다음 것도 골라 보아.”

 “말씀하세요.”

 “접대받는 녀석을 놀래킬 만한 것. 지금껏 맛보지 못한 것이라면 더욱 좋고.”

 “으음, 귀한 것을 찾으신다면….”

 “그게 아니다. 재미있는 것을 내놓아 보라는 게지.”

 사마계는 일부러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승표를 휘둘러 날을 남자에게 겨누었다. 이만한 조건을 내걸었으면 다예사에게도 꽤나 어려운 문제일 터. 내로라하는 암살자들만 모인 이 바닥에서 처음 보는 무기, 거기에 자신의 흥미를 채워줄 희귀한 것을 골라내려면 여간한 것으론 다관의 권위와 소문만 아래로 떨어질 게 뻔했다. 괜시리 심술을 부리고 싶었는가 묻는다면 기실 승표만으로 이미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나찰귀는 그 이름대로 탐욕스러운 여자여서, 감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남자에게 기대를 걸고 싶었던 것이다.

 

 “못 하겠다면 말아. 거기까지일 뿐인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호오?”

 “다만 손님의 치수를 꼭 맞게 알아야만 해서, 혹여 불쾌하실까 걱정이 됩니다.”

 “허하지.”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다예사는 승표를 지나쳐 뱀처럼 다가와 옷깃 위부터 어깨선을 따라 팔을 넘어 손목까지 다섯 손가락으로 느른하게 계의 피부를 더듬어댔다. 옷 위가 아니었다면 짧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조금 전보다 더욱 노골적인 접촉이었다.

 

 “모두에게 이런 식으로 구나.”

 “그 말씀은?”

 “모르는 척하긴.”

 “하하, 정말 모르겠습니다. 다만…”

 나찰귀께서는 특별하세요. 나찰은 다예사에 대해 모르고, 다예사는 나찰귀에 대해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걸 알았으니 처음부터 기울어진 저울이었다. 무엇이. 실력이 뛰어난 암살자라면 이 넓은 대륙에 차고 넘칠 만큼 많다. 굳이 이 남자가 특별함을 느낄 이유 따위 사마계에게는 짐작가는 곳이 없어 희고 긴 머리카락 사이 날개뼈 부근의 근육을 섬세히 재는 숨결에게 묻자 침묵만이 계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안달은 더 간절한 이가 가지는 것이어서 거기까지 손을 뻗고 싶지는 않았으나 여자는 원하는 것을 쟁취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욕망하면 가져야 했고 인내하기 어려우니 사람을 맨손으로 도륙내 죽이는 강인한 손에서 사슬이 휘둘렸다. 과연, 다예사의 솜씨 하나만큼은 칭찬할 만 하겠다. 참 쉽게 포박이 가능한 무기를 주었어.

 

 “대답해.”

 “다관 안에서의 폭력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허면 네 사심으로 시음하러 온 고객을 구석구석 더듬는 건 규칙에 들어맞고?”

 “이런, 한 마디도 안 지시다니! 알겠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이리 단단히 옭아매시니 도망칠 곳도 없군요.”

 “도망칠 생각 따위 없잖나.”

 “정말 한 마디도 지지 않으세요.”

 말대로 다예사는 움찔거리며 도망칠 의지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발간 얼굴로 양 손을 뻗어 아름답게 늘어진 백발을 어루만졌다. 나찰귀의 손짓 한 번이면 손쉽게 가슴이 뚫리고 심장이 뽑혀 절명할 수 있는 거리. 제아무리 규칙이 있다고는 해도 죽음이 두렵지 않거나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나찰을 상대로 거래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그런 도전이야말로 쉬이 질리지 않게 만드니 사마계는 언제든지 취할 수 있는 목숨보다는 답이 듣고 싶었다.

 달그락, 오래 끓다 못해 탕정湯鼎의 뚜껑이 수증기에 밀려 굴러떨어졌다. 오랜 정적에 떫도록 우려진 벽라춘은 이제 더 이상 마실 수 없을 테지만.

 다예사는 한 번도 방문한 귀빈의 입에 맞지 않는 차를 내온 적이 없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끊을 수 없다던 사슬 사이로 키잉, 하는 높고 새된 금속음이 울렸다. 계는 누군가에게 근력과 무력으로 밀린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전투에서 만능이지는 않았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곧 강함의 증표였어도 간혹 패배의 쓴맛이 혀 아래에서 굴러다니면 사마계는 빙탕 대신 승리에 도전했고 지금껏 그런 방식으로 취하지 못한 자는 섭소전 한 명밖에 없었으나.

 “탄소섬유를 직조해 만든 현絃줄. 가볍고, 단단하며, 사람의 살 정도는 두부처럼 썰어버릴 수 있지요.”

 사슬과 현줄이 강인한 힘으로 마찰하자 파작거리며 불꽃이 튀었다. 다예사는 주먹 하나로 이름을 날린 나찰귀에게 힘으로 전혀 밀리지 않았을뿐더러 어디선가 현줄 하나를 더 꺼내 두 겹으로 사슬 사이를 파고들어 빠져나갈 틈을 만들었다. 실제 사마계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지만 이미 승부의 답은 명확했다. 무방비한 몸 하나 완전히 무력화하지 못한 계의 패배였다. 

 “울림통은 열분해 탄소로 강철 같은 강도를 자랑하면서도 무게는 나무와 같습니다. 누가 보아도 평범한 악기. 본질은 당신께서만 아십니다.”

 “주먹을 휘두르는 내게 고금을 무기로 추천한다고.”

 “예.”

 당신은 나찰. 귀신에서 신이 되는 존재. 그렇다면 선녀인 척 해도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남자가 도박판에 전부를 걸자 사마계는 잠시 자신의 힘을 견뎌내는 현줄을 바라보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목이 잘릴 위기였다는 것을 알고서도 놀래킬만한 것, 한 번도 보지 못한 무기라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대담함이 좋았다. 막 다관에 발을 들였을 때 음흉한 놈이라는 평가를 물러도 괜찮을 정도로.

 “오래 전 수십 명의 조직원이 단번에 살해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모두 심장이 뽑히고 목이 잘려나갔다던가.”

 “흐음.”

 “범인은 아직까지 잡히지 않았다더군요.”

 “그대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군. 그래서?”

 “그 분을 만나면 꼭 이리 말씀드리려 했었지. 만약 저를 만난다면 당신은 그만한 복수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십 년도 더 전, 몸을 의탁하던 절을 습격한 자들이 왜 그랬는지는 계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불길과 같은 업화를 끌 줄 몰랐고 결국 죽음으로 끝날 세상,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물을 곳조차 없어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찢어가며 살았다. 만족했느냐 묻는다면 모두 이루고도 빼앗긴 것들은 돌아오지 않으니 영영 만족할 일은 없는 것이 죽음인데. 계는 남자의 말이 우스운 궤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지 않았다. 승표에 칠현금, 여기까지 만족시켰으니 다음에는 무엇을 주어 즐겁게 만들지 궁금했다.

 “허면 무엇으로.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고 심장이 뽑힌 놈들은 모두 지옥으로 향했는데 남은 것이 더 있나.”

 “글쎄요, 저는 그 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터라.”

 “네가 답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대답하라고.”

 “나쁜 거래는 아닐 겁니다. 귀께서는 흥미로운 것을 좋아하시고.”

 “…이름을 말해.”

 다예사는 지금껏 한 번도 불리지 않았던 본질을 기꺼이 속삭였다. 거래에는 동등한 값어치가 필요했으므로.

 “현서.”

 마지막 한 사람이 피가 낭자한 바닥 위로 쓰러졌다. 사냥을 마친 맹수는 길게 기지개를 켜다 혀를 찼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잡졸이다. 한 놈 정도는 살려줄까 했더니 모두가 이를 드러내고 달려들더라. 주인의 서슬퍼런 눈동자를 떠올리면 살아서 돌아간들 곧바로 목이 떨어져 나가겠지. 차라리 자신이 편한 죽음을 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이용당한 기분에 입안으로 껄떡지근한 찝찝함이 남았다. 약자에게는 달리 선택지가 없다. 내몰린 장기말은 체크메이트를 향하는 길 앞에 스러진다. 

 비굴한 운명에 대한 심상은 금방 도려졌다. 시신의 정장 주머니를 뒤지자 차키가 몇 딸려나왔다. 개중에서 유리창에 총알이 박히지 않은 녀석이 셋, 본넷과 헤드라이트까지 멀쩡한 놈을 찾으니 하나 뿐이다. 시동을 걸고 핸들을 돌리는 과정은 잡음 없이 부드러웠다. 운전석 옆의 선반을 열자 쿠바산 고급 시가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찰귀는 시신이 차고 있던 스위스산 은 시계와 이탈리아제 구두, 더 나아가 그들이 주문했던 고급 위스키를 떠올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문제작이거나 VIP 고객에게만 예약을 접수하는 장인의 수제품이었다. 허영심도 많지. 이렇게 되었으니 그 코를 완전히 꺾어야겠다. 시속 120km까지 가속하던 세단은 스무스한 움직임으로 좌회전과 우회전을 반복하다 도심에 접어들며 속도를 줄였다. 호텔 주차장에 도착하자 발렛 파킹 요원이 다가와 정중하게 섰다. 

 “상하이 콘티넨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발렛 파킹과 벨 서비스가 필요하신가요?”

 “맡기지. 지배인은?”

 “지배인께서는 언제나 여기 계시지요. 정원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둥글게 조각한 얼음을 꺼내던 계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곧 그는 찬장에서 원통형 잔을 하나 더 꺼내 얼음을 넣고 위스키를 채웠다. 찬 공기가 글라스에 닿자 표면에 희뿌연 성에가 끼었다. 제 몫의 잔을 쥐고 손목을 돌리면 카라멜처럼 진한 단 향과 호두와 밤을 닮은 고소함이 한 데 어우러져 공중을 잠식했다. 룸 서비스로 준비된 절인 햄과 치즈가 페어링으로 제격이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상하이의 밤은 화려한 색채를 지켰다. 무역선의 항로를 알리는 등대가 태양만큼 밝았다. 카지노나 호텔 루프탑, 해협 둘레를 빙 도는 크루즈에선 파티가 한창이었다. 하늘로 뻗어가는 레이저 광선이 대기권에 닿기 전 가루로 흩어졌다. 달과 별을 가리기엔 충분했다. 가장 높은 건물의 꼭대기층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쓸쓸해하는 취미따위 없었다. 새벽에 하루를 시작하는 사마계가 밤을 지새우는 건 누군가를 기다리는 까닭이었다. 짧은 시계 바늘이 1을 가리키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다예사입니다.”

 “직접 올 줄은 몰랐군.”

 “나찰귀의 주문이니 어찌 소홀하겠습니까?”

 “배달 직원들이 철저하고 꼼꼼한 솜씨로 운반하겠지. 네가 온 이유는 그게 아니잖아.”

 “하지만 제 몫의 잔을 준비하셨지요.”

 어깨 너머 조명 밑을 내다보며 다예사는 기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턱이 잡혀 강제로 고개를 돌렸다. 연보라색 눈동자는 야수의 푸른 시선을 마주했다. 돌연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손님의 방을 멋대로 염탐하다니.”

 “실례했습니다. 들여보내 주시겠어요?”

 “그래.”

 마지막은 약간의 비웃음이다. 이 정도는 금방 눈치 채셨겠지. 그래, 알아볼 것을 예측하고 수를 뒀다. 계산 하에 다예사는 문턱을 넘겼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여우처럼 약삭 빠른 발걸음이었다. 준비하고서 시간이 흘렀기에 다시 물방울로 변한 성에가 유리 표면 위로 흘러내렸다. 잔을 부딪힌 두 사람은 동시에 술을 머금고 목구멍 뒤로 넘겼다. 다예사는 차 뿐만 아니라 술에도 능했으며 단 맛을 머금은 알코올에는 사족을 못 썼다. 그러니 혀를 감싸오는 맛만으로 술병에 붙은 라벨과 생산년도를 손쉽게 파악했다.

 “나찰귀께서는 이보다 도수가 높아 맛이 깔끔한 술을 선호하시지.”

 “차를 권하는데 술 맛은 필요 없지. 뒷조사를 숨기지 않는군.”

 “이 암흑가에 당신 마음을 탐내는 자가 어디 한둘인가요.”

 “그럼 내가 이 술을 고른 이유도 맞춰 보아라.”

 “귀께서는 낭비를 싫어하시지.”

 가난한 유년기를 보낸 나찰귀는 무기 살 돈을 모으는 대신 신체를 단련했다. 주먹으로 머리통을 으깨고 손날을 가슴에 꽂아 심장을 움켜쥐는 괴물이 찻집을 찾다니 그것만으로도 센세이션이었다. 계가 돌아간 후 다예사는 기대 수익을 계산했다. 그에게는 돈을 모아 이뤄야 할 일이 있었고 뒷세계의 정보는 아무리 사도 부족했다. 가게를 운영하며 인맥을 넓히고 신뢰를 사면서 고상교라는 거대한 뒷배까지 두고도 모자라니 우연이라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접대가 익숙해진 남자는 주어진 물음에서 그 이상을 읽어내렸다.

 “저를 회유해서 귀께 무슨 이득이 됩니까?”

 저격수나 해커도 아니고 그저 다예사다. 도면을 그리고 금속을 녹여 본을 뜰 줄만 아는 손으로 어떻게 인간을 죽인단 말인가. 살아 숨쉬는 목을 부러트리는 것은 금속 관을 구부릴 때와는 다르다. 

 “반대다. 네가 나를 필요로 하겠지. 절박한 자는 배신할 수도 없고.”

 “확신하시는군요.”

 나찰귀가 무기를 샀다며 놀라워하는 사람들도 그 이유만은 묻지 않았다. 대오를 가르는 사대 일파, 그 중에서도 현음은 자본과 물자로 적을 짓눌렀다. 혼자 힘으로 최신 무기와 인해술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을 터. 그 역시 현음의 은혜를 입은 몸이었으나 안리화는 내부의 갈등을 방관했다. 한 남자가 죽고 현음곡 내부에서는 재판이 열렸다. 사마계는 남자가 먼저 자신에게 독을 먹였다 주장했으나 유족은 저 괴물이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했다. 남자가 살인을 준비했다는 증거는 없었으나 사마계의 몸에서 검출된 성분은 현음의 보물고에만 존재하는 독이었다. 보물고의 출입은 철저히 기록, 관리되나 이 보안을 뚫을 수 있는 사람이 딱 두 명 존재했다. 첫째는 보스고 둘째가 유통 물류의 총관리자인 죽은 남자의 모친이다. 공방을 이어가던 재판이 조직의 보수층과 젊은 신진 세력의 갈등으로 변질하자 드디어 안리화가 간섭했다. 판결은 일목요연했다. 죽음은 공평하고 힘의 세계에서는 살아남은 자가 옳다. 물론 짧은 선고 물밑의 속내를 모두가 알았다. 생존자는 일파에 힘을 보탤 테고 진 사람의 재물은 조직의 소유로 돌아가니 어느 쪽이든 주인에게는 이득이었다. 보물고의 관리자를 필두로 늙고도 오래된, 무수히 갈라진 총구가 저를 겨누자 계는 고향을 나서 도시로 향했다. 

 “그대는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신세지만 나는 딱 하나만 알아내면 됐어.”

 “독의 유통 경로군요.”

 경매에서 오래도록 품절이었던 물건이다. 멸종위기의 품종에서 채취한 독은 너무도 적절한 순간에 현음의 보물이 되었다.

 “그 독은 소전이 개인적으로 구입했더군. 아들이 저도 모르게 암시장 거래에 나섰으니 어미된 자도 꽤 놀랐을 거야.”

 “대가로 무엇을 건넸을지 모르니 일단 덮어두는 수밖에.”

 “결벽적인 성격이었어. 사적인 목적에 쓸 한 병의 독 때문에 조직에 책 잡힐 짓 안 해.”

 다예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을 죽인 남자를 잘 안다는 듯이 설명하는 나찰귀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결국 당신이 속았다. 어리석은 당신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점치면서.

 “그 돈은 스위스의 비밀 계좌로 향했지만… 얼마 전 계좌의 주인을 알아냈다. 어느 조직의 책사더군.”

 “이름을 듣고 싶군요.”

 “설호.”

 잔이 쏟아지면 이제 나찰이 웃음 지을 차례다. 반대편 자리에 앉았던 남자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거 봐, 구미가 당길 제안이라니까. 다예사는 자신의 비밀을 어떻게 알았는지나 설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허락된 것은 예 혹은 아니오의 두 가지 대답이다. 협력을 제안했으나 사실은 협박이다. 알고 싶으면 따라오라고.

 “귀께서는 정말… 지고서는 못 사시는 분이군요!” 

 “하하. 대답은?”

 “그래요, 제가 졌습니다.”

 “내가 거짓말했다고 의심하지 않는군.”

 “당신에겐 절 속일 이유가 없어요. 술을 곁들여 듣고 싶었던 이름을 준비한 것으로 충분하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설호를 마주 볼 때까지 전 절대 당신을 거스를 수 없으니까요.”

 “작은 실마리라도 놓칠 수 없겠지. 별개의 이야기다만.”

 난 그대가 마음에 들어. 그래서 기용하기로 결심했다. 나찰귀는 팔걸이에 괴었던 손을 뻗어 사내를 가리켰다. 차를 준비할 때처럼 향긋하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다예사는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그러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한밤중 계약이 성립되었다. 유령이 모습을 드러낼 시간이다.


 

 범인은 현장으로 돌아온다고 했던가. 파랑새는 가까이 숨겨졌다고 했나. 처음 손을 맞잡았던 상하이 콘티넨탈의 최상층, 얼굴을 알아본 총지배인이 열쇠를 건네준 최고 레벨의 스위트룸. 두 사람은 다시 약속의 장소로 돌아와 계단을 내달렸다. 호텔의 깊은 지하에는 고대 왕조의 보물을 전시한 갤러리가 있었고 설호의 우두머리는 이름답게 호랑이 가죽을 등에 둔 채 손님을 맞이했다. 유물 관리를 위해 내부는 서늘하고 사방의 벽을 콘크리트로 채워 본의 아니게 방음이 뛰어났다. 그래도 총 소리는 모두에게 들렸을 것이다. 쓰러진 남자의 뒤통수에서 솟아오른 피가 회색 바닥을 적시며 가라앉았다. 계는 한 발짝 움직여 경사면을 따라 흐르는 피를 피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따라서 무결했다. 배신의 죄를 범한 남자에게 같은 조직의 일원으로서 합당한 벌을 내렸다. 콘티넨탈의 규칙을 어긴 건 눈앞의 다예사다. 이대로 관청에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계는 튀긴 피를 닦지도 않고 우두커니 선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리석군.”

 “소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감수한다. 말만 번지르르해선.”

 “창취사를 죽인 시점에서 나찰귀와 저의 계약은 끝이지요.”

 “그러니까 당신이 무슨 참견이냐고.”

 낮게 웃던 계는 몸을 90도 정도 돌려 막아 세우듯 다예사를 마주보고 섰다. 이미 호텔 내부에서 살인을 저질렀으니 두 번은 쉽다. 진심을 다해 싸우면 저를 죽이진 못하더라도 치명상을 남길 것이다. 똑같은 상처를 돌려줘 봤자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지. 삶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고 죽음이야말로 그리운 가족에게 향하는 길이다. 유령은 맨손에 붙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사마계는 익히 알고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나찰귀는 죽은 남자를 사랑했다. 사신이 인정을 안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한 시간.”

 “그 전에 저는 죽겠죠.”

 “아니? 당장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 밀실의 출입구가 막혔겠지. 네게 주어진 유예가 바로 한 시간이다.”

 “한 시간이면 상하이를 벗어날 수도 없고요.”

 “육로라면 그렇지. 하늘길이라면 어떨까.”

 콘티넨탈 최상층 이용객은 귀가 서비스로 호텔의 헬리콥터를 대여할 수 있다. 흐릿했던 두 초점이 드디어 계를 바라보았다. 이유를 묻고 있었다.

 “말했잖아, 네가 마음에 든다고.”

 “당신의 목숨을 걸 정도로요.”

 “오만하긴. 난 죽지 않아. 그리고…”

 네 마음도 가져가야겠다. 나찰은 두 팔을 뻗어 다예사의 목을 감싸고 품에 가두듯 끌어당겼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정장 소매 밑으로 드러났던 맨손, 각 접힌 깃이 미처 감싸지 못했던 흰 목과 턱이 피투성이 남자와 접촉했다. 마침내 유령은 실체를 얻었고 온몸에 묻혔던 피는 여자를 고스란히 물들였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완벽한 공범이었다.

컨텐츠 정보

출연

현서

玄曙

제작

인외짱, 반트

사마계

司馬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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