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씬 시티
Sin City
잘게 내리는 빗방울이 질척한 도시, 미후신 시티.
음험한 밤공기 사이로 네온이 번쩍이는 이 도시에서 '쥰'은 처음 만난 여자 '세리나'와 하루를 보낸다. 눈을 뜬 다음 날, 쥰의 곁에서 잠들었을 여자는 의문의 시체로 발견된다. 붉게 물든 시트를 확인할 틈도 없이 들이닥친 이들로 인해 쥰은 순식간에 범인으로 몰리고 어떠한 해명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감옥에 가게 된다.
한편 바깥에선 죽은 사람이 된 세리나는 몸을 숨긴 채 계획했던 일을 진행한다. 부패와 범죄로 가득 찬 미후신 시티의 거물이자 자신의 핏줄, 미카사노미야 재단을 집어삼키기 위해.
그로부터 11년 후. 쥰은 그 날의 복수를 위해 원인을 찾아 나선다.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내겐 아직 목적지가 필요하다.

2005 | 125분
범죄 · 액션 · 드라마 · 스릴러 · 로맨스









내겐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가족도, 직업도, 명예도. 썩어빠진 법정은 쌓아온 것을 앗아갔고, 감옥은 편이 되어줄 모두와의 소통을 차단했다. 이제 지긋지긋한 씬 시티엔 더 이상 나를 보는 이가 없다. 복수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글쎄. 어차피 방향을 잃은 삶이라면 새로운 목표를 정해두는 게 어째서 손해란 말인가.
나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을 추적할 것이다.
긴 여정이 되겠지. 오히려 잘된 일이다. 내겐 목적지가 필요했다.
* * *
비포장도로 특유의 흙먼지가 차창에 끔찍하게 들러붙었다. 운전자는 영수증 뒷면에 적힌 주소를 읽자마자 구겨 버렸다. 낡은 차가 엔진을 달달 떨어가며 속도를 올렸다. 지도를 펼치거나 시야를 확보해 가며 안내 표지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감옥에서 그 긴 시간을 썩었어도 쥰은 이 도시 골목 하나하나까지 전부 신물이 날 만큼 익숙했다. 손에 넣은 주소지의 건물은 눈속임용 간판을 달고 있었다. 안에서는 시시덕거리는 목소리와 총기를 손질하는 소음이 새어 나왔다. 빈집이었다면 비슷한 짓을 몇 번 더 해야 했을 그에겐 반길 만한 일이었다.
쥰은 술에 취하지도, 약을 하지도 않았지만 건물을 앞에 두고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 픽업트럭이 그대로 건물 입구를 향해 돌진했다. 셔터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차는 멈추지 않고 거칠게 내부로 침범했다. 차 바깥, 건물 안, 그 안팎이 중첩된 공간이 소란으로 뒤덮였다. 중구난방으로 돌아가는 범죄자 일당이라고 해도 나름의 동지 의식이나 체계는 있는지 누군가 다급히 습격이라고 외쳤다. 그제야 핸들을 놓은 쥰은 운전석의 창문을 내렸다. 내리라고 고함친 상대에게 응답하듯 들이민 건 총열과 총구였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뭐?”
“11년 전 사건이야. 당신들이 그곳에 있었는데.”
몇 명이 시선을 교환했다. 개중 눈썰미 있는 자가 먼저 탄식했다.
“아하, 알만하네.”
“아는 게 있나?”
“감옥에서 예의 있게 질문하는 법은 안 알려줬나 봐…….”
총성이 울렸다. 순식간이었다. 방아쇠가 계속해서 당겨졌다. 그들의 팔다리, 가슴, 머리에 총알이 꽂혔다. 좁은 운전석 창문만으로는 부족했다. 조직원들 역시 차창을 깨트리려 할 때, 쥰은 몸을 틀었고 탄창을 교체하며 바깥으로 굴렀다. 낡은 조명이 깜빡였다. 조직원 하나가 욕설을 쏟아내며 총을 들었다. 재빨리 무게중심을 아래로 낮추고 차량 보닛 위로 뛰어올랐다. 반대편으로 미끄러지며 집요한 헤드샷이 몇 번 더 이어졌다. 어느새 조직원은 고작 두 명이 남았으나, 쥰 역시 멀끔하진 않았다. 살얼음 같은 대치 상황을 대화로 전환하는 것은 침입자의 몫이었다.
“나름대로 배워 온 방법인데. 어때?”
“하, 빌어먹을 미카사노미야.”
쥰은 말재주가 없었고, 욕설로 응수한 이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정보를 캐내려는 목적이면 어찌 굴러가도 죽이진 못할 거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날붙이에 반사된 빛이 눈을 찔렀다. 쥰은 피로한 기색으로 덤벼든 이를 붙잡고 바닥을 구르며 뒤편의 한 명을 개머리판으로 후려갈겼다.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겼다. 탄약의 여파에 쥰 역시 마른기침을 했다. 남은 이는 칼을 빼 들고 덤비는 대신 뒷걸음질 치는 걸 택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쥰이 총을 겨눴다.
“잠깐, 잠깐만. 끈 떨어진 곳 의리를 지켜서 뭐 하겠어. 다 말할게!”
“……잘됐네. 바라던 바야.”
“망할, 그 집안이 엮인 일은 어째 뭐 하나 깔끔한 게 없어…….”
“아까 분명 미카사노미야라고 했지. 그 재단 말인가?”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가 났다. 조직원이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그는 경찰이 꿈이기라도 했는지 집요하게 캐물었다. 지난한 심문이 사이에서 쥰은 기억에 있는 이름을 잡아냈다.
“세리나, 그 여자를 본 건 우리도 그날이 처음이었어.”
“세리나?”
“설마 누군지 몰라?”
“그럴 리가. 당신들이 타깃으로 삼은 여자였지…….”
십 년도 더 지났다. 조잡한 흑백 필름으로 뽑아낸 흐린 영상 같을지언정 그 밤의 기억은 쥰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 종달새처럼 조잘거리던 여자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끝까지 내려오지 않는 블라인드 틈으로 새벽의 가느다란 빛이 들어왔다. 그 아래 검붉은 액체가 하얀 시트를 더럽히고 있었다. 모든 것을 공표하듯 차갑고, 훼손된 시신. 몸에 새겨 넣은 문신처럼, 원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장면을 끊어내며 그는 조직원을 똑바로 바라봤다. 핏발이 선 눈은 내면에 도사린 어떠한 감정을 억누른 채였다.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조직원은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어? 나랑 같은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본데.”
손을 뻗기 애매한 위치로 작고, 아주 거슬리는 가시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조직원은 확신 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투로 설명을 덧붙였다.
“난 그 사람을 말하는 거야. 미카사노미야 세리나.”
쥰은 여자의 성을 몰랐다. 무언가 끊어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익숙한 환청은 모든 것이 비롯된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이상할 만큼 맞닿은 손은 부드러웠고, 다정한 말씨로 이름을 불렀다. 상념을 깨트리듯 조직원이 말했다. 가장 커다란 오류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정정되었다.
“그날 우릴 부른 여자 말이야.”
탕, 다시 한번 총소리가 울렸다.
* * *
“왜 여기 있어요?”
“왜 여기 있지?”
고저가 다른 목소리가 같은 의미를 지니며 겹쳤다. 세리나는 시선을 내리깔며 웃었고, 쥰은 설명하기 힘든 어색함에 입을 다물었다. 수정 샹들리에가 공간을 금빛으로 채웠다. 쥰이 아무리 눌러도 미동 없던 엘리베이터는 세리나가 카드를 금속 패널에 가져다 대자마자 두 사람을 환영했다. 질문이 돌아올 법도 한데 세리나는 한참 침묵을 고수했다. 쥰은 금속 패널의 가장 끝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결국 당신을 만났군.”
“날 기억해요?”
“그 눈 색은 흔하지 않잖아.”
실내등이 세리나의 눈을 희게 밝혔다. 세리나는 언제 쥰을 도와줬냐는 듯 거리를 지켰다. 층수가 오를 때마다, 쥰은 이 도시에서 멀어지는 감각을 받았다. 얼마 전, 분쟁을 일단락하고 대표 자리에 올라 모든 걸 거머쥐었다던 여자는 슬퍼 보이지도, 기뻐 보이지도 않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음, 복수하고 싶어서?”
“비슷해.”
“역시…….”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잡아내기도 어려운 목소리로 세리나가 웃었다. 직접 모함했던, 적의만을 지니고 찾아왔을 손님과 단둘이 마주하며 보이기엔 지나치게 태연한 기색이었다.
“돈이 필요한 거라면 줄게요.”
“뭐?”
“이제 그 정도는 어렵지도 않아요…….”
넓지도 않은 직육면체의 공간에서 쥰은 세리나에게 다가섰다. 세리나는 물러서지도, 밀어내지도 않고 고개만을 꼿꼿이 들어 바라봤다. 쥰은 지독한 농담이라도 들었단 얼굴이었다. 그게 우스워 세리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거지.”
“과한 바람은 당신을 탈 나게 할 걸요.”
“그러면 뭐, 탈 나는 거고.”
대책 없이 완고한 태도였다. 세리나는 수완이 좋았고, 설득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분간할 줄 알았다.
“당신이 너무 불행해지지는 않길 바랄게요.”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도시의 야경, 끝없이 이어지는 밤하늘이었다. 미카사노미야 재단의 새 오너, 피가 섞인 가족을 전부 밀어내고 정점에 오른 여자. 모든 계획에서 누명을 쓴 남자는 변수조차 되지 못하는 사소한 존재였다. 세리나는 겉옷을 여몄다. 겨울은 지났지만 미후신 시티의 밤은 언제나 차가웠다.
“내가 누군지 알아요?”
“기억한다니까.”
세리나는 괜스레 가벼운 투로 물었고, 질문의 의도를 짐작하면서도 쥰은 어긋난 답을 뱉었다. 정답은 아니었으나 오답도 아닌 그 답은 많은 것을 내포했다.
“…….”
“세리나.”
쥰이 덧붙였다. 세리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미카사노미야의 성씨를 붙이지도, 범인 따위의 정보를 붙이지도 않은 간결한 호칭이었다. 누구도 정정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섰다. 고개를 숙이거나 반 뼘만 끌어당겨도 체온이 겹칠 거리였다. 몸을 숙이면 그의 품 안엔 사각지대가 생겼다. 세리나는 쥰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된 걸 실감하며 작은 물건을 꺼냈다. 쥰은 세리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소음기를 단 총 특유의 기묘한 발포음이 둘 사이에서 울렸다. 쥰이 고개를 들었다.
“원하는 걸 보여줄게요.”
“무슨 말을…….”
“이번에도 유일한 목격자가 되겠네요.”
차분한 선언에는 일말의 웃음기도 스며들지 않았다. 세리나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진실을 전한 건 변덕에 가까웠다. 쥰은 제 시야가 이상할 만큼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걸 감지했다. 세리나는 그를 두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쥰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고, 팔다리가 감각을 잃은 것처럼 저려올 때, 세리나는 난간 위에 서 있었다. 깜빡.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쥰은 이를 악물었다. 본능에 가까웠다. 모든 게 십일 년 전, 잠들었을 때와 닮아 있었다. 휘청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숨이 턱 막히는 것과 동시에 허공으로 뻗어 나가던 손 전체를 손바닥으로 틀어쥐듯 붙잡았다. 타이밍이 좋았다. 세리나의 발끝이 공중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잡았어.”
“왜…….”
약효가 퍼져나간 탓에 쥰의 몸은 점점 가라앉았다. 발을 잘못 디뎌 뒤로 기울어지면서도 손끝에 들어간 힘은 풀지 않았다. 그대로 모든 걸 끝내려던 여자를 강제로 끌어 올렸다. 우악스러운 동작에 세리나의 발등이 난간 위쪽에 부딪혔다. 망설일 틈은 없었다. 쥰의 등 역시 맨바닥에 내던져졌다. 몽롱한 정신으로 세리나의 행동을 따라잡으려던 쥰이 짧게 웃었다. 왜냐니. 당연한 질문을 다 한다는 기분이었다.
“나도 불행해지긴 싫어서.”
숨을 몰아쉬어도 시야는 검었다. 억지로 기운을 짜낸 몸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남자는 같은 풍경을 두 번 볼 생각이 없었다. 틈을 남기지 않고 강하게, 있는 힘껏 여자를 품에 가뒀다.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내겐 아직 목적지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