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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도

無間道 (Infernal Affairs)

 갱단의 스파이로 일하게 된 경찰과 홍콩의 악명 높은 갱단에서 경찰로 잠복한 조직원의 운명이 겹치기 시작한다. 복수와 귀환이라는 목적 속에서 두 남자는 비극적인 선택을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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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 100분

느와르 · 범죄 · 서스펜스 

1.

그날 예염은 후덥지근한 오디오 숍 안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안 팔아도 괜찮으니까 카운터에서 자리만 지켜 달라는 말을 남기고 급히 자리를 떠난 조현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예염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본래 가게 운영이며 고객 응대, 물품 관리까지 숍에 관련된 일은 모조리 조현의 몫이다. 서예염은 어쩌다 한 번씩 가게에 들러 주변을 순찰하거나 어색한 태도로 안쪽을 기웃대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내면의 외침은 목 안쪽에서만 고요히 메아리쳤다. 당사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처음 한 시간, 예염은 공연히 음향 기기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초조함을 달랬다. 안타깝게도 별 효과는 없었다. 두 시간째, 먼지투성이라 희뿌연 공기며 미지근한 정적이 어쩐지 위태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세 시간째, 낡아빠진 골동품 시계에서 나는 째깍째깍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꼭 심장소리에 맞춰 가슴을 압박하고 있는 것 같단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네 시간이 지났을 무렵. 예염은 불안감과 답답함에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 되었다. 하는 일 없이 자리만 뭉개고 있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서예염은 지난 8년간 의무와 압박 속에서만 살아왔다. 그러니 이런 한가로운 시간은 오히려 죽을 맛인 거다. 

‘도저히 안 되겠어.’ 

조현의 부탁이고 뭐고. 이 정도 자리를 지켰으면 할 만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뜨려니 이상하게 간절해 보였던 조현이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삼합회의 조현. 늘 웃는 얼굴의 회계사. 그는 멍청하고 거친 말단 조직원들에게조차 모난 말 한 마디 한 적 없는, 이 바닥에서 보기 드물게 친절한 남자였다. 예염은 처음 조직에 들어왔을 때부터 조현과 얼굴을 맞대 왔다. 그의 노련함과 상냥함에 도움받은 적도 많았다. 그런 그가 혹시나 가게를 비운 일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은 서예염의 나쁜 버릇이다. 이번에도 그 버릇이 발목을 잡아 그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어차피 오늘 하루 공친 거. 딱 한 시간만 더 버틸까. 한 시간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별안간 내내 무겁던 가게의 문이 열렸다.

“……?!” 

“운영하나.”

예염은 나쁜 짓을 하다 부모에게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구두코에서 단단한 턱 끝까지 시선이 올라갔다. 돌연 눈이 마주쳐 예염은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느새 카운터까지 온 남자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해… 하고 있어.” 

예염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남자는 못 미더운 듯이 예염을 바라보다가 한마디 내뱉었다.

“그럼 둘러보지.” 

“……마음대로.”  

이번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대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휙 몸을 돌려 숍 안쪽까지 뚜벅뚜벅 걸어갔다. 예의라곤 없는 손님이었다. 처음엔 짜증이 났지만 생각해 보니 차라리 이런 손님이 나은 것 같았다. 이것저것 물어보며 조언을 구했다면 예염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하여간. 아무리 종업원에게 관심이 없어도 손님이 있는 것과 없는 건 천지차이라 서예염은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이 떨렸다. 남자는 가게에 진열된 레코드판을 멀거니 바라보거나, 오디오 기계의 다이얼을 만지작거리며 물건을 고르는 것 같았다. 예염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서 남자의 옆모습을 힐끔거렸다. 어두침침한 실내에서 남자의 머리카락은 언뜻 붉게 보였다. 긴 머리카락은 아래로 깔끔하게 내려 묶었고, 깨끗한 와이셔츠와 가느다란 넥타이는 각이 살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단정한 검은 코트는 갑옷마냥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 마주쳤다면 말 한 마디 제대로 걸어보기 어려운, 딱 보기에도 냉기가 풀풀 풍기는 남자였다. 

안타깝게도 몰래몰래 남자의 얼굴을 힐끔거리는 행위는 영업에 전혀 도움이 안 됐다. 뭘 사러 온 건지, 아니면 구경하러 온 건지도 알 수 없으니. 그저 멀뚱멀뚱 자리를 지키는 것밖엔 못했다. 찾고 있는 물건이 있는지 물어라도 봐야 하나? 조현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머릿속에선 남자에게 다가가 살갑게 말을 걸고 물건을 권하는 조현의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 난 그런 건 절대 못 해!’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안다고 다 실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시뮬레이션은 예염을 우울하게만 하고 끝났다. 체념한다고 불안이 없어지지도 않으니 배로 억울했다. 그저 울적한 맘으로 상황을 비관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예염의 얼굴을 뒤덮은 어둠이 슬슬 가게를 뒤덮으려던 찰나. 

“이봐…” 

남자의 손가락이 카운터를 톡톡 두드렸다. 예염은 이번엔 맹수에게 발견당한 새끼 짐승처럼 놀랐다. 상대는 한심하게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아무 관심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예염을 보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입꼬리와 그 위로 놓인 시릴 듯이 푸른 눈동자. 이런 상황인데도 어쩐지 눈과 얼굴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단 생각이 들었다. 오밀조밀 빚어진 콧날과 턱선에 비해 홍채는 지나칠 정도로 차갑고 매서웠다. 

“물건 안 파나.” 

“아, 아니… 팔아.”

“…….”

남자는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예염을 쳐다봤다. 긴장한 채로 눈치만 보던 예염이 뒤늦게 아차했다. 

“……뭐, 뭐 살지 정했으면! 계산해 줄게.” 

“…….”

예염이 허둥지둥 카운터를 나서 남자가 보고 있던 기기 앞으로 향했다. 계산을 기다리다가 졸지에 종업원과 눈싸움을 하게 된 남자는 천천히 발을 옮겨 예염을 뒤따랐다. 남자가 고른 물건은 커다란 앰프였다. 음향장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예염은 이게 좋은 물건인지 아닌지도 몰랐다. 그저 모서리에 붙은 가격표를 몰래 힐끔대고는 어물어물 숫자를 읽어주는 게 다였다. 가격을 들은 남자는 막힘없이 현금을 꺼내더니 툭 말했다. 

“포장.”

“배… 배달도 해줄 수 있는데.” 

“들고 갈 거다.” 

“알았어…”

남자의 말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도 없었다. 예염은 어쩐지 그와 말할 때마다 주눅이 들었다. 낑낑대며 앰프를 가지고 와서 얼기설기 포장하는 동안 남자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익숙하지 않은 일에 초짜 종업원은 헤매기 바빴다. 포장 대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긴 시간이 흐르고, 예염이 겨우겨우 그럴듯한 손잡이를 만들어 건네자 남자는 한 손으로 앰프를 받아갔다. 맥빠질 정도로 손쉬운 태도였다. 대놓고 비교당한 기분에 억울하고 허탈해졌지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잠시동안 서예염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예염의 붉은 눈동자를. 시선이 느껴지니 예염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는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남자가 눈치껏 지나쳐 가기를 기다렸다. 지금껏 몰래몰래 남자를 힐긋거렸으면서 막상 본인이 관찰의 대상이 되자 당혹스러움이 밀려왔다. 비겁하고도 죄의식 어린 감정이었다. 마음속으로 욕설이 나오기 직전, 남자가 마침내 시선을 뗐다. 

“…….”

‘네, 감사합니다’ 라든가 ‘많이 파세요’ 라든가. 그 흔한 인사 한 마디조차 하지 않고 남자는 가게를 떠났다. 남자가 떠나고 나서야 예염은 겨우 긴장을 풀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뭐, 뭐야…? 저 사람…….” 

예염이 괜히 눈가와 뺨을 한 번씩 문질렀다. 당연하지만 묻어나는 건 없었다. 깨끗한 손등을 보자 이유도 모른 채 기분이 찝찝해졌다. 얼어붙을 듯이 차가웠던 푸른빛 시선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더 흘러 조현이 돌아올 때까지, 예염은 단정한 구두가 박차고 들어왔던 문틈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2.

“그래서 가게를 맡아주고 있었어요?” 

“그냥 갈 수도 없잖아…!”  

“하긴 그 가게도 중요한 근거지니까. 당신이 ‘진짜’ 조직원이라면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죠.” 

“…….” 

“칭찬한 거예요, 방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옥상 위. 하늘엔 연회색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햇빛은 구름 뒤에서 오래된 조명처럼 울렁거렸다. 공기는 무덥고 습기가 잔뜩 차서 세상은 꼭 녹청색 필터를 낀 것처럼 보였다. 회색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선글라스를 낀 여자는 빙그레 웃으며 서예염을 바라보았다. 잿빛 와이셔츠에 양쪽으로 어깨 벨트를 한 그는 경찰이라기보다는 군인에 가까워 보였다. 출신은 숨길 수 없다고 해야 하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 구역 머리가 된 초 국장이 과거 군부대에서 어떤 식으로 이름을 날렸는가는 영웅담 수준으로 퍼져 있었다. 초옥련이란 이름자만 들어도 벌벌 떠는 놈들이 한 트럭이라는 소리까지 사실처럼 돌았으니 말 다 했다. 

그런 초 국장의 칭찬에도 예염은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콘크리트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쭈뼛거리기만 했다. 그 옆에서 담배를 태우던 옥련은 긴장 좀 풀라는 듯 어린 부하를 살짝 건드렸다. 예염은 새끼 짐승처럼 놀라는 대신 어깨를 감싸쥐며 토라진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거짓말…….”   

“왜 이렇게 서운한 말을 해요.” 

“내가 별로 잘 못 하고 있으니까 날 안 부르는 거 아니야?” 

“어머나.” 

예염은 상대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우중충한 도시를 가만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초 국장은 이 어린 수하가 진심으로 풀죽어 있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 얼굴 좀 봐요.” 

옥련은 부드럽게 타일렀다. 예염이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돌렸다. 경찰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번듯하던 소년의 얼굴은 어느새 꼬질꼬질해져 있었다. 변함없는 건 기합 정도였다. 예나 지금이나 서예염은 긴장을 지나치게 하는 성격이라 매사 어깨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간 경향이 있었다. 항상 날을 세우고 주변을 경계했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상사까지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초옥련이 높이 산 건 바로 이런 태도였다. 8년 전 부임을 앞둔 초 국장에게는 위협에 예민하고 충실한 개가 꼭 필요했으므로. 

“당신은 잘 하고 있어요. 제가 의심스러워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그냥?”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잖아. 나는 여기서 8년이나…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있으니까.”

“불안한가요?” 

“가끔은… 내가 경찰인지, 아니면 그냥 범죄자인지 모르겠어.” 

스무 살도 되기 전, 어린 예염은 모든 기록을 말소당한 채 삼합회로 보내졌다. 이제 그가 경찰이었던 걸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 그리고 옥련 뿐이었다. 경찰학교 시절, 서예염을 초옥련에게 소개했던 교장은 암살당해 죽었다. 초옥련마저 죽는다면 서예염의 신분을 회복시켜줄 사람은 남지 않는다. 데이터 측면, 그리고 사회적 측면에서도. 

“흔들린다고 고백하는 건가요?” 

“그, 그건 절대 아니야!”

서예염이 화들짝 놀라 거세게 부정했다. 그 반응을 본 초옥련은 표정을 감추지 않고 웃었다. 

“아니면 제게 투정 부리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 것도 아니라고…!”

“그러면 뭔가요.” 

“…….” 

서예염은 변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결국은 투정이었다. 하지만 예염의 말대로였다. 8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동안 서예염이 접촉할 수 있는 경찰 측 인물은 초옥련뿐이었다. 그간 서예염이 해온 일들은 경찰보다는 삼합회 조직원에 더 가까웠다. 보스의 목을 치기 위해 신용을 얻는 과정이라지만 명분만으로는 손을 깨끗하게 할 수 없었다. 어느덧 그의 영혼은 더러워졌고 발자취는 검고 끈적끈적하게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서예염이 아직 경찰로 일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어리고 순수하기 때문이었다. 설령 윗사람을 믿지 못할지라도 명령에는 순응하는 온순한 기질.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이 정말 옳은 것이라면 가혹한 환경에 내던져져 욕을 한바가지 쏟아내더라도 견디고 싶어하는, 가련할 정도의 정의감이 루이옌을 보호하는 동시에 이 거친 세계로 내몰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투정은 제게 해도 좋아요. 얼마든지 받아 드릴게요.” 

“…내가 어린애인 줄 알아. 아니라니까.”  

“후후. 하지만 마음이 흔들리는 건 제가 막을 수 없는 일이죠.” 

“…….” 

“당신의 정체를 아는 건 이제 이 세상에 저밖에 없어요. 제가 없으면 당신은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해요.” 

“……협박하는 거야?” 

“그럴 리가 있나요. 알려 주는 거랍니다.” 

초 국장의 말은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상냥했다. 

“잊지 말아요. 당신이 누구인지.” 

그가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며 다시 웃었다. 

“…….”

“당신만 잊지 않는다면 제가 반드시 건져내 줄테니까요.” 

결국 서예염이 바라는 것은 이런 말이었을 것이다. 증명할 수 없는 말 외에는 초옥련이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예엄은 안개가 잔뜩 낀 하늘을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언제나처럼 그가 할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초옥련은 서류 결재의 마지막 과정을 기다리듯, 인내심 있게 예염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알았어.” 

이윽고 꾹 다물린 입술 사이로 도장이 찍히는 것처럼 순종적인 한 마디가 삐져나왔다. “기쁘네요.” 초옥련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적어도 마음만큼은 언제나 거짓이었던 적이 없었다. 비록 미래를 약속하는 말은 위태롭고 어설플지라도. 그를 다시 건져내주겠다는 마음만큼은.

“……가 봐야 돼. 이제 조현이 슬슬 날 찾을 거야.” 

“그 회계사 말이죠.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에요.” 

“성격이 좋으니까… 그쪽은 내가 어린애인 줄 알고 신경쓰는 거지. 진짜로 친한 건 아니야.” 

“저에게 변명할 필요는 없어요.”

옥련이 놀리듯이 웃자 예염의 눈썹이 삐죽 솟았다. 옥련은 재빨리 손으로 입을 가리고 표정을 감추었다가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필요하면 신호해요. 우리가 가르친 방식으로요.”

“…….”  

“그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니까요. 자, 어서 가 봐요.” 

서예염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난간에서 손을 뗐다. 공기는 여전히 축축하고 무거웠다. 도시를 짓누르는 안개는 도무지 걷힐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3. 

창백한 전등이 실내를 비추는 사무실. 이미 해가 다 떨어져 사무원들은 집에 간 지 오래였다. 창밖의 어둠은 블라인드에 가려져 안쪽으로 침범하지 못했다. 언뜻 오싹하게 느껴질 정도로 생기 없는 공간에는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홀로 남아 있었다. 책상 위로는 풀어헤친 넥타이와 모서리가 닳은 파일철, 싸구려 볼펜 따위가 굴러다녔다. 잔뜩 인상을 쓴 남자는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 상대는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 가게에 왔었어? 말하지. 

“광고할 일 있나.” 

- 그래도 싸게 사면 좋잖아. 

“됐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 흐음. 

“……왜.”

- 아니, 이제 제법 부유한 공무원처럼 말한다 싶어서.

“…….” 

- 오해하지 마. 나쁘단 건 아니야. 

“안 했어.” 

- 하하… 알아. 혹시 몰라서. 

조현은 여전히 여유롭고 상냥한 투였다. 삼합회의 이름난 회계사 조현은 이 세계에선 드물게도 뒷면이 없는 남자였다. 적견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경계심은 다른 문제였다. 털을 세우고 주변을 불신하는 태도는 적견의 장점이었으니 진심으로 트집을 잡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현은 희귀한 남자답게 넉살 좋은 투로 적견을 대했다. 그 마음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건 아마 적견뿐일 것이다. 

- 아, 가게 지키고 있던 녀석은 예염이라고 하는데. 걔가 너한테 계산해 준 거 맞지? 

“그래.”

- 너 나가고 나서 들어왔으니 만난 적은 없겠지만. 나이는 너보다 좀 어려. 나보다도 어리고. 

“…….” 

- 너도 소개시켜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좀 낯을 가리긴 해도 괜찮은 애야. 귀엽고. 

“넌 늘 그렇게 말하지.” 

- 아하하. 꼭 그런 건 아닌데? 

“너한테 어린 녀석들한테는.” 

- 아, 그건 부정할 수가 없네.

수화기 너머로 조현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조현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그래도 그것 뿐만은 아냐. 

“그러면.”

- 그 애, 너하고 좀 닮았거든. 

“…….” 

- 꼭 옛날의 너를 보는 것 같아. 

적견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현 역시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는데도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지난 8년간, 조현은 보스 대신 적견과의 의사소통을 담당해 왔다. 조현은 그에게 지시를 전달하고 적견은 군말 없이 따랐다. 매주 두 번씩 전화로 수다를 떨고는 있지만 그들 사이에 대단한 접점은 없었다. 뒷골목에서 태어나 아무 연고도 없이 조직에 주워졌다는 점이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조현이 조금 더 빨리 자리를 잡았고 적견은 그 다음이었다. 과거 때문인지 예나 지금이나 조현은 자기보다 어리거나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약했다. 이제는 노련해진 적견에게 그가 연민을 품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통화 내용을 듣고 있노라면 사무적인 태도는 오직 적견의 전유물일 뿐이며, 조현은 생사를 나눈 동료이자 친우로 상대를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일은. 잘 되고 있어? 위험한 건 아니지? 

조현이 부드럽게 침묵을 깼다. 적견은 짧게 답했다. 

“문제 없다.” 

- 거래 일자는 바꿀까? 아니면 그대로 두는 게 좋겠어? 

“당장 바꾸면 들켜.” 

- 그것도 그래. 그럼 네가 힘내줘야겠네. 

“말 안 해도 그렇게 해.” 

- 아하하. 그래. 알지. 

조현은 가식 없는 투로 긍정했다. 그가 주는 친근감과 유대감은 아마 일부분 사실일 것이다. 적견은 8년 전 보스의 명령을 받고 경찰에 잠입했다. 전과가 없다 못해 신원조차 확실하지 않았던 그는 순전히 능력과 시간을 통해 이 자리를 따냈다. 답 없이 과묵한 성격은 강직함으로, 고지식함은 충성심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신분은 경찰학교에 입학하며 새로이 써졌고,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뒷골목 아이의 과거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버려진 개의 내면이 얼마나 깊고 어두운지, 그가 무슨 마음을 품고 경찰을 꿈꾸었는지, 그리고 왜 조직의 명령을 따라 모든 걸 바치고 정해진 길에 헌신했는지 따위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마 이제 와선 적견이 인생을 뒤흔들 정도로 격렬한 감정을 품고 있다고 고백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게 삼합회 시절 동료든, 아니면 경찰서 사무실 옆자리에 앉은 동료든간에.

- 그럼 믿을게. 우리 쪽에서 해야할 게 있으면 알려줘. 

“그래.” 

- 보스께서도 널 많이 보고 싶어하셔. 

“…….”

- 그러니까 지금 보스 말이야. 

조현은 전에 없이 신중한 태도로 ‘지금’이라는 단어를 발음했다. 그들 사이에는 미묘하게 정의가 다른 단어들이 있었다. ‘지금 보스’와 ‘보스’, ‘전 보스’ 라는 명칭들이 그랬다. 적견은 잠깐 말을 멈추었지만 이내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알아들었다.” 

- 별로 기쁜 소식은 아닌가? 

“아무 생각 없어.” 

- 그렇게 말할 줄은 알았지만.

“알면 왜 묻지.” 

- 내가 널 보고 싶어한단 건 어때? 

“헛소리.” 

- 하하……. 

조현은 시덥지 않은 소리를 늘어놓고 즐겁게 웃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달칵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얘기해.” 빠르게 말한 적견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눈치 빠른 조현이라면 알아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전화가 다시 걸려오진 않았으니 묵언이 곧 긍정이었다. 무기질적인 실내에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울려퍼졌다. 선글라스를 낀 초 국장이 웃으며 적견을 바라보았다. 

“아직 퇴근 안 했네요.” 

“……최근 조직 동향이 심상치 않아서.” 

“그래서 잔업하고 있던 거예요? 집에 있는 가족이 외로워하겠어요.” 

“집엔 아무도 안 삽니다.” 

“후후. 적 반장님 같은 분께 연인이 없다니 아쉽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려요.”

“아쉬울 건 없겠죠.” 

돌아오는 대답은 지극히 차가웠지만 그래서 더 통상적이었다. 평소 적견은 누구에게나 이런 식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초 국장은 적견의 평소같음에 안심한 듯 책상에 가볍게 몸을 기댔다. 적견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초옥련의 손에 뭔가 들려 있었다. 

“그건.” 

“지난 거래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품인데, 우리 쪽에서 인수하겠다고 했어요.” 

초옥련은 엄지와 검지로 비닐팩을 잡고서 양쪽으로 가볍게 흔들다가 장난처럼 툭 내려놓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증거품이 책상으로 떨어졌다. 비닐팩 안에 든 건 구식 휴대 전화기였다. 

“조사한 다음 진척이 있으면 보고해 줄래요?” 

“업무 지시였습니까.” 

“마침 적 반장님이 퇴근하지 않아 다행이었죠.” 

적견은 군말 없이 지퍼백을 받아들었다. 초옥련은 잘 꾸민 손톱 끝을 바라보다가 다시 적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는 이번 시대에야말로 그들을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요.” 

“…….” 

“우리도, 그쪽도. 그저 저주 받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고대에서부터 내려온 뿌리깊은 저주. 아마 그 저주의 이름이 있다면 증오겠죠.”

“증오의 뿌리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적견이 말했다. 언제나처럼 냉혹한 말투였다. 그런데도 기민한 초옥련은 그 말 사이에 뭔가 다른 감정이 끼어들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어렴풋한 예감일 뿐이어서 숨소리 한 번에 휙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건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증오가 우리 쪽으로 향하진 않도록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군요.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시니까.”  

초옥련이 시선을 완전히 옮겨 적견을 응시했다. 이어진 말에 사라졌던 예감은 다시 형태를 갖췄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감정이 복잡미묘한 존중인지, 질투인지, 아니면 그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증오인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삼합회의 전 보스를 처단한 젊은 신인 초옥련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영웅담처럼 알려져 있다. 당시 우스운 동경을 담아 마신이라 불리던 남자를 쓰러뜨린 건 초옥련의 특수부대였다. 적견 역시 그 일을 알고 있었으니 언급하는 건 이상할 데가 없었다. 

“적 반장님 입으로 들으니 조금 부끄러운 걸요.” 

“대단하시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어머나… 후후. 별 말씀을요.” 

물끄러미 적견을 바라보던 옥련은 그의 눈빛을 아주 차가운 존경심이라 해석하기로 했다. 옥련은 이제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적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적견은 뻣뻣한 자세로 앉아 초 국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광경은 엄격한 위계질서를 형상화한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전복시키려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이미지였다. 

“다음엔 적 반장님도 그 자리에 함께 있을 거예요.” 

“…….” 

침묵하는 적견을 두고 초옥련이 흘긋 지퍼백 쪽을 바라보았다. 

“그 핸드폰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테고요.” 

“…그렇습니까.” 

“네, 적 반장님처럼 유능하신 분이라면 분명 아무 효력 없는 증거품을 처리하는 방법도 알고 계시겠죠.” 

“…….” 

“이건 비밀이랍니다.”  

적견은 초 국장의 말에 담긴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시선을 옮긴 초옥련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눈을 보여주었다. 가볍게 접힌 눈꺼풀 사이로 예리한 홍채가 보였다. 마신과의 격전 끝에 잃어버린 한쪽 눈은 완전히 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행위가 의미하는 바 역시 간결했다. 속내를 보여준 것이다. 측근이니 오른팔이니 하는 말은 지금 처음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평소처럼 굴어야 했다. 자그마치 8년. 초옥련을 살해하기 위해 버틴 시간들이 그러했듯이. 국가의 충직한 개이자 초옥련의 하수인인 척해야 했다. 이전 주인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물론.” 

그러나 진실은 그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결단코 잊을 수도 없다. 

 

4.

서예염은 전례없이 긴장한 상태였다. 저녁놀이 가고 어스름이 내려앉을 때쯤 예염은 은근슬쩍 본거지에서 벗어났다. 비록 허드렛일만 하긴 했지만 8년간 그가 쌓은 신뢰는 헛것이 아니어서 보스는 너그럽게 이 일탈을 용인해 주었다. 마신 자겸이 함락당한 이후 그대로 삼합회를 삼킨 세영은 전 보스와 정 반대 타입의 리더였다. 호쾌하고 다정한 우두머리를 표방하면서도 지독하게 교활하고 음침했다. 이러나 저러나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지만 예염 입장에서도 물러날 수 없었다. 지난밤, 연락용 핸드폰을 통해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초옥련은 처음 이 핸드폰을 건네며 여기로 오는 연락은 반드시 받으라고 당부했다. 또, 자신 역시 특수한 단말기로만 연락할 테니 걱정 말라고도 덧붙였다. 지난 8년간 이 핸드폰은 딱 세 번 울렸다. 한 번은 보스인 세영이, 또 한 번은 초옥련이 죽을 뻔했던 때였으며 마지막 세 번째는 지금이었다. 서예염은 단말기가 울리자마자 화들짝 놀라 전화를 받았다. 초옥련은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10초 안에 지시를 내리고 통화를 끊곤 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퍼뜩 서예염은 초옥련의 또다른 당부를 떠올렸다. 

- 그럴 일은 웬만해서는 없겠지만, 혹시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이 전화로 연락한다면……. 

그땐 바로 전화를 끊어. 

그리고 단말기는 물에 던져버려.

서예염은 융통성이 없는 성격이었다. 시키는 일은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해냈다. 그 충성스러운 성질이 막 발현되려던 찰나였다. 수화기 너머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톡, 톡. 

서예염은 누군가가 핸드폰의 마이크 부분을 손으로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톡, 톡, 톡… 톡, 톡, 톡……

그것도 일정한 박자와 법칙을 가지고. 

서예염은 전화를 끊어야 한단 것조차 잊고 소리에 집중했다. 짧은 신호, 그리고 긴 신호. 신호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초옥련은 필요하면 ‘우리가 가르친 방식으로 신호하라’고 말했다. 경찰학교에서는 서예염에게 두 가지 신호로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초옥련과의 중요한 대화 역시 대부분 모스 부호로 이루어졌다. 그 모든 걸 떠올리니 수화기 너머의 신호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신호는 한 번 끊어졌다가, 다시 한 번 반복되었다. 이미 바짝 곤두선 신경은 빠르게 소리가 의미하는 바를 읽어냈다. 

머릿속에서 소리는 숫자 몇 개로 바뀌었다. 두 개, 그리고 네 개, 다음은 세 개, 다시 세 개. 서예염은 총 열두 개의 숫자를 늘어놓고 세 가지로 나누었다. 어렵지 않게 숫자들이 배열되어 뜻하는 바를 속삭였다. 날짜, 시간. 그리고 공간. 

의미는 분명했다. 수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은 나와 접선하고 싶어한다. 그게 누구든간에. 

곧 통화는 끊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을 상대로 꾸준히 신호를 보냈으니 참을성이 좋다고 할 만했다. 서예염은 삽시간에 정서불안으로 빠졌다. 초옥련이라면 바로 목소리를 확인시켜줬을 것이다. 그는 쉬운 길을 두고 굳이 빙빙 돌아가는 성격이 아니다. 굳이 말하지 않았다는 건 말할 상황이 아니거나, 아니면 초옥련이 아니란 건데. 전자라면 당장 달려가야 하고 후자라면 절대 가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무슨 근거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나? 

서예염은 명령을 따르기에 급급해서 스스로 자기 인생을 결정하는 데에는 젬병이었다. 돌발상황이 생기니 어찌할 줄을 몰랐다. 결국 이런 일이 생기면 자기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드러나게 되기 마련이다. 서예염은 혹시나 초옥련이 위험에 빠진 게 아닐까, 그래서 말 대신 신호로 도움을 요청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위협을 무릅쓰고 접선 장소에 나가기를 택했다. 까딱하면 모든 일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앞에 있는 일 하나를 못본 척 지나가지 못해서. 

어슴푸레한 저녁 도착한 곳은 한적한 건물이었다. 규모도 작고 낡아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곳 같았다. 서예염은 잔뜩 털을 세우고 목을 움츠린 채 안으로 들어섰다. 조명은 어두침침했고 분위기는 우울했다. 겁먹은 고양이처럼 고개를 이쪽저쪽 돌려 보니 접수대와 양 옆으로 여는 문이 보였다. 접수대엔 당연하게도 아무도 없었는데, 반쯤 찢긴 티켓과 포스터, 팜플렛이 근처에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서예염은 유난히 빳빳한 티켓 한 장을 조심스럽게 들어 살폈다. 날짜, 시간. 그리고 장소. 서예염이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숫자들과 똑같았다.  

그걸 보고 나니 문 너머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예염은 티켓을 그대로 들고 살금살금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는 강한 빛이 새어나왔다. 서예염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가 겨우 다시 떴다. 완전히 발을 내딛자 문 안쪽은 어두웠고 번쩍거리는 건 스크린 뿐이었다. 초라한 스크린 위로 흑백 필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예염은 순간적으로 얼이 빠져 화면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 흰 얼굴 또 흰 머리 검은 얼굴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이윽고 카메라가 두 사람을 포커스했다. 가까이 들여다본 그들은 서로를 향해 매섭고도 열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영화관이라기엔 오래된 상자 같은 이 공간엔 50석도 채 안 될 것 같은 의자들이 늘어서 있었고, 관객은 딱 한 명 뿐이었다. 예염은 맨 뒤에 서서 스크린을 넋놓고 바라보는 불청객이었다. 티켓도 사지 않았고 영화 이름도 모르니 어쩌면 이 자리가 그에게 딱 맞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정체도 이름도 모르는 관객 한 명만은 그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앉아.”

“누, 누구야, 당신……!” 

“아직 안 끝났으니까.”

그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객석 중앙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으니 무슨 표정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서예염은 바짝 긴장한 채로 기웃거리며 그가 앉은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그는 새카만 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어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림자 같아 보였다. 모자 챙이 만드는 그림자가 교묘하게 얼굴을 가렸다.  

“나… 나를 부른 게 당신이지?” 

“…….” 

“대답해!” 

“…이미 말했다.” 

“뭐?” 

서예염은 점점 초조해져서 기본적인 에티켓조차 지키지 못했다. 어차피 둘밖에 없는 폐극장에서 에티켓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잔뜩 겁먹어 소리를 지르는 서예염을 두고도 상대는 지극히 침착했다.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무심한 반응이 이어지자 예염은 별 것 아닌 일로 혼자 난리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왠지 수치스럽고 민망해졌다. 

상대, 그러니까 서예염을 불러낸 의문의 검은 관객은 어떤 이유에서건 예염이 조용해졌으니 그만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시종일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머쓱해진 예염은 다시 시선을 스크린으로 돌렸다. 남자의 말대로 ‘아직 안 끝났다’. 아까 전에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두 사람은 이제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영화를 보자고 부른 거야?” 

“본 적 있나.”  

다소 멍청하게 묻자, 검은 관객이 처음으로 말을 받아주었다. 서예염은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몰라… 모르는 영화야.” 

“그래.” 

“유명해?” 

“아니.” 

“그러면… 왜 보고 있는데?” 

공연히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하게 됐다. 예염은 눈치를 보며 다가가 그와 같은 줄, 조금 떨어진 위치에 앉았다. 나란히 앉은 모양새가 되자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졌다. 그런 걸 신경 쓰는 것도 예염 뿐인 것 같긴 했지만. 

“여기서밖에 못 보니까.” 

관객은 한참 말이 없다가 짧게 답했다. 예염도 더 묻지 않고 흘러가는 필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인물은 울컥울컥 검은 피를 토해내고 있다. 아까까지는 스크린 안에 보이지 않던 여자가 검은 권총을 들고 총구를 겨눈다. 다른 인물은 눈물을 흘리며 피를 닦아내려 애쓰더니 품속에서 총을 꺼낸다. 의미심장한 배경음악이 깔리며 긴장감이 고조되던 찰나 눈물 흘리던 쪽은 총을 던져 버린다. 경쾌한 마찰음이 들리고 곧 총성이 이어진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어.” 

그 말대로였다. 클라이맥스는 이미 다 지나가 버렸고 설명도 부족했다. 그저 관련 없는 장면들이 조각조각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당연한 감상에 관객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조금은 긴장이 풀리니 주변도 눈에 들어왔다. 시각은 암흑에 차츰 적응되었다. 모자를 눌러쓴 남자는 긴 머리카락을 내려 묶고, 차가운 시선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서 쏟아지는 밝은 빛은 남자의 시리도록 푸른 눈을 비췄다. 푸른 눈. 얼어붙을 것 같은 시선. 예염은 순간 흠칫했다. 

“당신……!” 

하지만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나 그를 몰아세울 수도 없었다. 오디오 숍에서 커다란 앰프를 사간 남자, 전화기 너머로 예염에게 모스 부호를 보낸 남자, 모자를 눌러쓴 정체불명의 관객이 애달픈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썹이 아주 조금 일그러지고, 입매가 아주 조금 비틀어진 것뿐이었지만. 평소의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본 적 있는 예염은 눈치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고통스럽다는 것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쏟아지는 고통을 견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단 것을 말이다. 

그 표정은 시종일관 얼굴을 가면처럼 덮고 있던 냉담한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게다가 낯익기까지 했다. 예염은 금방 기시감의 정체를 찾아냈고, 다시 조용해졌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품은 얼굴. 그 깨질 듯한 표정은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다. 거울 속에서 매일매일 마주치는, 질릴 정도로 익숙한 모습이었다. 

“…….” 

“거의 끝나간다.” 

“알았어…” 

그 사실을 눈치채자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느슨해졌다. 예염은 순순히 영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필름 속의 사람들도 나름대로 치열했다. 서로를 미워하는 듯했던 두 인물은 나란히 총을 맞아 죽는다. 피웅덩이 속에서 창백한 두 손이 서로를 맞잡는다. 그러나 그것조차 총성에 묻히고 만다. 두 사람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영화가 끝나나 싶을 때쯤, 손가락이 몇 개 떨어진 팔 한 쪽이 절벽을 기어오른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살아있었다. 살아남은 쪽은 죽은 이의 몸을 통과한 탄환을 주워 무언가 확인하려는 듯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그리고 종막.

여전히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크레딧이 올라오자 예염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남자는 다시 무심하고도 냉랭한 표정을 내걸고 있었다. 

“…여기서만 볼 수 있어서, 보는 거라고 했지?” 

남자는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틀어 예염을 바라보았다. 이제 모자 그림자 아래로도 선명한 눈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짐승의 것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였다. 

“그러면… 좋아해?” 

유명하지도 않고, 내용도 다 아는 것 같은 영화를 굳이 들여다본다면 이유는 하나가 아닌가. 일반적인 추론임에도 예염은 자신이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았나 안절부절못했다. 남자는 가만히 서예염을 바라보다가 답했다. 

“그래.” 

“…….”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야.” 

“그러… 면?” 

“싫어하기도 해.”

“좋아하면서 싫어한다고…?”

“보고 싶지만…” 

보기 싫기도 해. 

뒷말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잠깐 말을 멈췄던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모르겠군.” 

“……자기 마음인데?” 

“내 마음인데도.” 

“이상하네.” 

“알아.” 

“…나쁘다는 건 아니었어.” 

예염은 급히 덧붙였다. 남자는 하나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마음이 쓰였다. 그는 모자 챙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럴 땐 하나만 생각하려 하지.” 

“하나는 어떻게 정해?” 

“제일 중요한 것.” 

“제일 중요한 거…….” 

“나를 여기에 데려다준 게 뭔지.” 

“나를 여기에…….” 

메아리처럼 뒷말을 따라 중얼거리던 서예염은 자연스럽게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여기 온 이유는 하나. 그를 부른 사람 역시 한 명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런 의미로만 말하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를 여기에 데려온 건 전화 한 통. 그 전화기는 낮의 세계와 서예염을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예염은 벼락같이 깨달았다. 그러나 서예염이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기도 전, 완전히 몸을 돌려 예염을 마주본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잊지 마.” 

“…….” 

“내가 누구인지.” 

“…….” 

적견이란 이름은 사냥개에게서 따온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푸른 눈의 사내는 수도 없이 자신이 이름을 버린 계기를 되뇌었다. 

“그럼 괜찮아져.”

그렇게 하면 눈앞의 이 아이를 대할 때도 냉정해질 수 있다. 

다 흘러간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아는 이름은 없었다. 

전부 지워졌다. 


 

5. 

헤어지기 전, 남자는 주머니에서 상영시간표를 꺼내 건네주었다. 예염은 떨떠름한 얼굴로 모서리가 닳은 종이조각을 손에 쥐었다. 그는 언제 다시 보자는 말도 없이 훌쩍 사라져 버렸다. 남자가 사라지고 나서야 예염은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은 누구인지, 어느 쪽 사람인지, 왜 나를 여기로 불렀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허탈해진 서예염은 혹시나 싶어 남자가 건네준 종이조각을 샅샅이 뒤졌다. 당연하게도 비밀 메세지 같은 건 없었다. 대신, 귀퉁이에 이름 하나가 휘갈겨 써져 있었다. ‘적견’ 

“…무슨 사람 이름이 이래?” 

짐승의 이름으로 쓰는 적에 개 견… 잘 봐줘도 사냥개란 뜻이었다. 그런데도 예염은 ‘적견’이란 글자를 보고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이름이 사냥개라면 썩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일하는 모습도 물어뜯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쉽게 연상됐다. 초 국장의 사람이라면 분명 실력 있는 경찰일 것이다.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보면 예전부터 조직을 쫓아온 걸까? 아무 소득 없는 만남이었으니 그만둬야 맞는 걸텐데. 궁금한 점이 너무 많았다. 서예염은 꼬깃꼬깃 접은 상영시간표를 다시 펼쳤다. 일주일 치 영화 상영 스케쥴이 적혀 있었다. 상영작은 단 하나. ‘지옥’이라는 이름이 붙은 단편영화 뿐이었다. 

지옥. 지옥이라. 

서예염은 그날 봤던 영화의 내용을 되새겨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던 두 사람, 그들의 분노와 다툼, 두 사람 사이로 총을 들고 난입한 적. 비극적인 이야기 같긴 했지만 지옥 같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너무 가까웠다. 총성과 피, 부정적인 감정, 가까운 사람의 죽음과 배신은. 예염이 조직에 잠입한지도 어느덧 8년째였다. 이제는 온건하고 평화로운 교류보다 폭력과 험담이 익숙했다. 그러니까 스크린 속 세상은 서예염의 현실인 것이다. 지옥이란 단어를 들으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끔찍한 모습을 상상한다. 매 순간 자신이 숨쉬고 있는 세계를 지옥이라 명명하는 건 스스로에게도 괴로운 일이 아닌가. 서예염은 스스로의 삶을 죽어 받는 형벌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긴 고민 끝에 결국 예염은 다시 한 번 상영관을 찾았다. ‘지옥’이 상영되는 가장 빠른 일자와 시간에 맞춰 건물에 들어서니 역시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이번에야말로 중요한 것들을 물어보겠다며 스스로를 별렀지만 사실 합리화에 불과했다. 서예염이 이곳에 온 이유는 그냥, 다시 한 번 적견을 보고 싶어서였다. 호기심과 관심 그리고 죄책감이 뒤섞인 감정은 열렬하진 않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됐다. 마치 손톱 아래에 박힌 가시 같았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 속에서 계속 신경이 쓰였다. 내버려둔 채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상영관 안쪽은 이전과 달리 불이 반쯤 켜져 있었다. 아직 영화가 시작하기 전인 모양이었다. 적견은 그날처럼 객석의 중앙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영사기가 돌아가지 않으니 그가 보는 곳은 빈 화면이며 딱딱한 벽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꼭 뭐가 보이는 사람처럼 지긋이 스크린을 응시했다.

“……저기.” 

예염은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빈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뿐임에도 분위기가 너무 차가워서 말 한 마디 걸기 힘들었다. 이럴 때를 보면 오디오 숍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던 그 남자가 확실한데. 예염은 이제 적견을 볼 때마다 그날 봤던 표정이 떠올라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한 순간 흘러갔던 그의 위태로운 얼굴은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지는 신기루 같았다. 그런데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으니 이상할 따름이었다. 짧은 순간 스쳐지나간 표정이지만 예염은 그 애달픈 모습이 남자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어쩔 도리 없이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그 자신이 약함을 흉내내기보다 강함을 지어 입는 성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 왔군.” 

미동조차 없던 남자는 마침내 입을 열어 한 마디 했다. 별 것 아닌 말에도 예염은 안도했다. 그가 무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같은 공간에 있음을 인지해주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샌가부터 남자에 대한 요구는 대단히 소박해져 갔다. 예염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고서 말을 이었다. 

“그, …적견이 네 이름이야?” 

남자는 이제서야 고개를 돌려 예염을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시선이 닿자 왜인지 목이 뻣뻣해지고 어깨가 절로 펴졌다. 몸을 꽉 웅크리고 싶기도 하고 반대로 마구 펼치고 싶기도 한 기분이 들었다. 

“읽었나.” 

“응. 보라고 써둔 거 아니었어?”

“맞아.” 

“읽었어, 이름이라고 생각하니까 좀 이상하긴 했는데…” 

예염이 슬쩍 시선을 돌려가며 적견의 눈치를 살폈다. 스크린의 불빛이 없는 적견은 그저 냉랭해 보이기만 했다. 주눅이 들어 조금씩 말끝이 흐려졌지만 벌써 꼬리를 내릴 순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은 서예염이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눌러가며 말했다. 

“…그래도 어울려. 그래서, 이름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 이름이?” 

“응… 별로야?” 

“아니.” 

적견은 짧게 답하더니 “이름은 맞아.” 하고 덧붙였다. “맞구나…” 말 몇 마디만 나눴을 뿐인데 어쩐지 힘이 쭉 빠졌다. 매사에 긴장하는 거야 익히 알고 있던 나쁜 습관이었지만 평소와는 느낌이 아주 약간 달랐다. 가슴이 쿵쾅대며 뛰고 심장 아래쪽이 조여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한 마디라도 더 그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러나 입을 여는 순간, 적견이 검지손가락을 세워 자기 입 앞에 댔다. 

“시작한다.” 

“아.” 

동시에 불이 꺼지고 영사기가 차르르 돌아갔다. 커다랗게 쓰인 ‘지옥’이 스크린 가득 떴다. 시작부터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 자리 건너 앉은 남자가 좋아하는 영화라고 하니, 어떤 작품인지 열심히 보고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본다고 쉽게 이해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조각조각 난 필름을 오려 붙인 듯 난해한 구조는 여전했다. 영화의 첫 장면은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집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인물들은 예고도 없이 피웅덩이 속을 뒹굴고 뒷골목에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누가 주인공인지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떨 때는 머리가 검은 인물이 주인공 같다가도 또 다른 순간엔 머리가 하얀 인물이 주인공 같았다.

예염은 파스스 흩어지려는 집중력을 그러모아 꾸역꾸역 영화를 마저 봤다. 잠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어느덧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 햇살이 내려앉은 집에서 함께 깨어났던 두 사람은 영화가 진행되며 싸우기도 하고 서로를 배신하거나 죽이려고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머리가 검은 인물은 항상 먼저 화내기를 그만두었다. 서로를 향한 분노 어린 눈빛은 사실은 열렬한 애정을 가진 시선이었다. 그들은 마음을 확인하고, 머리가 하얀 인물은 상대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머리가 검은 쪽은 말한다. 충성 같은 건 맹세하지 않아도 돼. 대신 너의 사랑을 달라고. 

‘로맨스 영화였어…?’ 

예염은 살짝 놀랐다. 그야 적견은, 적어도 지금까지 예염이 느낀 바로는 로맨스 영화와 거리가 먼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일말의 접점조차 없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치만 좋아한다고 했는데.’ 

영화가 시작한 이후로 적견은 부쩍 말이 줄어들었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더없이 진중했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이후로는 예염이 한 번 본 장면들이 이어졌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검은 피를 토해낸다. 그의 눈은 색이 옅어서 흑백의 세상 속에서도 언뜻 푸르게 보였다. 흰 머리카락의 인물은 품에서 총을 꺼냈다가 무슨 생각인지 던져 버린다. 철과 돌이 마찰하는 소리가 어울리지 않게 경쾌했다. 이윽고 총을 가진 여자가 두 사람을 쏘아 죽인다. 맞잡은 손이 클로즈업되고 둘은 절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기어올라온 건 한 사람 뿐. 그는 탄환을 주워 오래도록 바라본다. 무슨 징표라도 찾는 사람처럼.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예염은 불쑥 홀로 남은 그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자신 같기도 하고, 옆에 있는 적견 같기도 했다. 피범벅이 된 배우의 얼굴은 적견과 하나도 비슷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적견이 좀 더 말끔하고, 좀 더 체구가 작고, 좀 더 날렵했다. 머릿속에서 배우와 적견의 얼굴을 겹쳐 보던 예염이 퍼뜩 고개를 뒤흔들었다. 무슨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이번엔 이해 됐나.” 

상념을 깬 건 적견의 목소리였다. “어?” 예염은 놀라서 단숨에 반문했다가 “아, 응.” 하고 급히 대답했다.

“두 번째라서 그런지 그렇게 안 어려웠어.” 

“어려운 내용은 없어.” 

“그치만 지금도 다 알아들었는진 모르겠는데… 어려운 거 맞아.” 

예염은 소심하게 말했다. 따라붙은 침묵은 부정의 의미 같진 않았다. 그 태도에 부쩍 용기가 생겨났다. 예염이 조심스레 물었다. 

“있잖아. 이 영화 왜 좋아해?” 

“…….”

“…질문이 어려워? 그러면… 좋아하는 장면이 뭐야?”

예염은 살짝 바꿔서 다시 물었다. 너무 범위가 넓고 추상적인 질문은 답하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적견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마지막.” 

“마지막?” 

예염은 조금 놀랐다가, 적견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는 아름답고 따스한 집이나 사랑을 갈구하는 장면보다 허망한 최후를 좋아하는 게 좀 더 어울렸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석연치 않았다. 긴장을 놓아서인지 속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난, 그건 좀… 슬픈 거 같아…” 

“…….” 

“…나쁘단 건 아니야! 나는 그냥.” 

어쩐지 좋아한다는 장면을 험담한 꼴이 된 것 같아 예염은 서둘러 말을 고쳤다. 그러나 그 순간, 적견의 얼굴 위로 그날의 표정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통을 참는 듯한, 애석함을 내리누르는 사람의 낯. 그건 분명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모습이다. 돌아갈 수 없는, 다신 되찾을 수 없는 무언가가 적견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불현듯 예염은 깨달았다.

‘나도 똑같아…’ 

그가 적견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기만 해도 편안해진다고 한다. 서예염 또한 적견의 존재만으로 위로 받고 있었다. 만나봤자 말 몇마디 나눌 뿐인데도 그가 보고 싶었던 건 두 자리 건너 앉아 있는 사람이 나와 마찬가지란 사실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적견은 예염이 경찰이라는 걸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마 이 세상에 초 국장과 적견, 그리고 예염 본인을 합해 세 사람 뿐일 것이다. 그래서 적견 앞에서만은, 이 영화관 안에서만은 예염도 시름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지금 자기가 조직원인처럼 보이고 있는지, 아닌지, 누가 나를 의심하는 건 아닌지, 주시당하고 있진 않은지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시선은 악의가 아닌 관심이라 느껴졌고 얼굴을 관찰해도 싫지 않았다.

“……있잖아.” 

적막과 함께 엔딩 크레딧이 흘러가던 때. 예염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 또 와도 돼?” 

적견은 푸른 눈으로 예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느슨해졌던 몸이 그의 시선 하나에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쯤 적견이 말했다. 

“난 매번 여기 와.” 

서예염은 그 말이 허락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기뻐졌다. 


 

6.

이후로 그들은 ‘지옥’ 상영 시간마다 영화관에서 접선했다. 이제 와선 적견이 누구인지 초 국장과는 어떤 관계인지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를 만나는 시간이 마냥 기다려졌다. 그를 만나는 순간에는 예염의 정체성 또한 확고해졌다. 적견이 말했다. 혼란스러울 때면 자신을 이곳에 데려다준 게 뭔지 생각하라고. 상영관으로 예염을 부른 사람은 적견이었다. 그러니까 영화를 볼 때만큼은 딱 하나만 생각하면 됐다. 새카만 옷으로 몸을 뒤덮고 모자를 푹 눌러쓴 이 남자에 대해선 생각해도 괜찮다고 허락 받은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영화는 늘 똑같았다. 프레임 하나 달라지는 법이 없었다. 몇 번 관람하자 예염도 이제는 장면의 순서와 내용을 줄줄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예염은 역시 슬픈 장면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극적인 결말이라도 인물들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차라리 좋았다. 그러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 가장 좋아진 것도 당연했다. 두 사람이 눈을 맞추고 뺨을 쓰다듬는 장면에 다다르면, 예염은 자기도 모르게 입 속으로 영화의 대사를 외웠다. 

충성 같은 건 맹세하지 않아도 돼.

대신 너의 사랑을 줘.

너의 사랑을 줘… 

“이봐.” 

“헉.” 

영화가 다 끝나고 불이 켜졌는데도 예염이 일어나지 않자 적견은 예염의 무릎에 손을 댔다. 예염은 의자에서 거의 튕겨져 나올 뻔했다. 생각보다도 큰 반응에 적견은 무안한 눈치로 손을 뗐다. 예염은 뒤늦게 민망해져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됐다.”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니야…!” 

서예염은 억울해져서 언성을 높였지만 변명할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예염을 보고 적견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표정이 여전히 무뚝뚝해서 더 괴로웠다. 이게 다 대사 때문이었다. 등장인물의 말 한 마디를 너무 신경 써서 이렇게 된 것이다. 

다음 회차, 예염은 최대한 그 장면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또 멍청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어서였다. 화면 속의 인물은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웃고 있었다. 몇 번 되풀이하며 보자 그가 흰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에게 이상할 정도로 유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몇 번 봤을 때 느낀 분노나 둘 사이의 다툼은 오로지 흰 머리카락을 가진 인물에게서 기인한 것이었다. 검은 머리의 연인은 그저 상대에게 맞춰주었을 뿐이다. 그는 긴 손을 뻗어 흰 머리칼의 상대의 뺨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리고 서예염은 또 이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데에 실패했다. 

- 충성 같은 건 맹세하지 않아도 돼.

‘충성 같은 건 맹세하지 않아도 돼. 대신…’ 

- 대신 너의 사랑을 줘. 

‘너의 사랑을 줘…’

서예염은 늘 똑같은 스크린보다 적견의 반응을 보는 데 더 관심이 있었지만, 이 장면에서만큼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입 속으로 자꾸만 대사를 되풀이하게 됐다. 아무래도 적견 역시 눈치챈 모양이었다. 다섯 번째인지 여섯 번째쯤 되던 날 그는 불쑥 말했다. 

“넌…” 

“응?” 

“그 장면을 좋아하는군.” 

“뭐? 아, 아니야.” 

“눈을 못 떼던데.” 

“…영화 보는 중이니까 화면 쳐다 보는 건 당연하지.”

예염이 필사적으로 부정하자 적견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사실은 적견의 말이 정확했다. 곧이곧대로 긍정하지 못하는 건 찔리는 데가 있기 때문이었다. 예염은 뭔가 이상해져 가고 있었다. 사랑 고백을 하는 장면에서는 눈을 못 떼고 그 이외의 시간엔 적견을 바라보는 데에 몰두했다. 입 속으로만 외웠던 대사는 자꾸만 목소리가 되어 튀어나오려 했다. 어느 순간부턴가 예염은 스스로를 말리는 데 급급해서 그 외의 것들은 깜빡 잊어버렸다. 자신의 지금 처지까지도 말이다. 

계절이 하나 지나갈 무렵 초 국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예염은 상영시간표를 뒤적이며 다음 약속을 가늠하다가 연락을 받았다. 이번 연락은 전용 핸드폰이 아닌 단말기로 왔다. 초 국장은 언제나처럼 짧고 간단하게 용건을 말했다. 

- 거래일 확인이 필요해요.

“저번에 전달했는데… 다시?” 

- 네. 작전일이 바뀌었거든요. 누군가 이 일을 눈치챈 것 같아요. 어쩌면 우리 내부에서. 

“……그쪽에도 첩보원이 있단 소리야?” 

- 지금은 추측일 뿐이지만.  

초 국장은 부정하지 않았다. 예염은 군말 없이 수락하고 거래일을 재확인해 은밀히 신호하겠다 약속했다. 통화가 끊어지기 직전, 서예염은 망설이던 질문을 꺼냈다. 

“있잖아, 저번에 준 전화기…” 

- 아, 말하는 걸 잊었어요. 그건 폐기해 줘요. 

“…버려?”  

- 네. 더는 안 쓸 거예요. 이쪽에서도 짝이 되는 통신기는 폐기했으니까요. 

“폐기했다고…….” 

-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예염은 멈칫했다. 초 국장은 무슨 일이 있으면 사소한 거라고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니까 폐기했다는 핸드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그 상대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나고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알려야 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 후후. 너무 긴장 말고요. 문제 생기면 신호해요. 우리가 가르친 방식으로. 

하지만 서예염은 밝히지 않았다. 말해 버리면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 갖지 말아야 할 만남에 푹 빠졌다. 그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데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초옥련은 말했다. ‘잊지 말아요. 당신이 누구인지.’ 

또, 적견도 이렇게 말했다. ‘잊지 마. 내가 누구인지.’ 

그 두 사람이 말하는 ‘나’는 각각 다른 사람 같았다. 아니, 절대로 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럼 누구를 택해야 하지? 빛과 그림자 물과 기름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나는 누가 되어야 할까? 

골몰하는 와중에도 마음은 정직하게 상영관을 찾았다. 조직의 일을 처리하느라 상영 시간에 늦은 바람에 내부는 벌써 캄캄했다. 언제나처럼 객석 중앙에 모자를 눌러쓴 일등 관객이 보였다. 예염은 머뭇거리다가, 평소보다 두 칸 더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적견이 바로 옆 자리에 있었다.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눈이 마주치고 머리를 살짝만 기울여도 코끝이 닿을 것 같았다. 용기는 냈지만 결과는 생각보다도 감당하기 힘들어서 화면에 하나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적견을 관찰하는 것마저 어려워졌다. 

“오늘은.” 

“어?” 

“여기인가.” 

영화가 한창 진행되던 중간에 적견이 불쑥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깝게 보여 예염은 순간 당황했다. 스크린 안에서는 예염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지만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그냥… 불편해?” 

“……별로.” 

적견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평소처럼 차가운 태도에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심기가 불편해지진 않은 것 같았다. 예염은 맥박을 가라앉히기 위해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칼의 인물이 손을 뻗어 연인의 뺨을 쓸었다. 뒤로는 분수가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다. 햇빛이 물방울 방울 사이로 부서지며 보석처럼 빛났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은 대사가 이어지려는 순간. 적견이 불쑥 끼어들었다. 

“충성도 맹세도 사랑도.”

언뜻 그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달콤한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예염은 처음으로 장면에서 고개를 돌려 적견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얼굴을. 이번에 화면에 시선이 못박힌 건 예염이 아닌 그였다. 사랑을 속삭이는 두 연인을 앞에 두고 적견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목숨이 다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그 말을 들은 순간. 불현듯 예염은 이 말이 작별인사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작별의 상대는 나란히 앉은 한 사람이 아닌 세상이었다. 고작 나만을 위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단 건 예염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비참할 정도로. 

“그, 그러니까 죽지 마!” 

“…….” 

“죽으면 아무 짝에도 소용없으니까… 방금 네가 말 했잖아.”

“어차피 소용없는 것들 뿐이라면?” 

“그렇지 않아. 꼭 그런 건 절대……” 

당황한 채 주절주절 말하던 예염은 멈칫했다. 내가 뭐라고 세상이 아름답고 쓸모있다고 설득하지? 자기 자신도 그런 걸 느끼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 설득은 상대를 위한 게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한 거였다. 그의 존재를 멋대로 써서 위로를 얻었으니까. 마음 가는 대로 사용해 놓고서 아쉬워 그만두지 말라고 하고 있다. 스스로의 행동원리를 깨닫자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져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예염이 조용해지자 적견은 흘긋 그쪽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어차피 이제 곧이다.” 

“아…….” 

“너도 알다시피.” 

거래일을 이야기하는 거다. 순식간에 영화관의 불이 모조리 켜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지금껏 눈을 돌리던 사실들이 창백한 조명 아래 낱낱이 드러났다. 적견은 초 국장의 눈을 피해 서예염을 만났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부턴 그도 자신과의 만남이 그저 즐겁기를 바랐다. 아무 이유 없이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저 만남 그 자체가 만남의 사유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감출 것 없이 후련하고 기쁠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허상이며 감히 꿈꿀 수도 없는 저 하늘의 별 같은 소원이었다. 바랄 수 있는 건 아주 작고 한정적인 것뿐이다. 서예염은 별처럼 크고 뾰족한 소원을 자르고 깎아내 한 톨의 먼지만큼 작게 만들었다. 그렇게 남은 건 딱 하나. 

바라건대 그가 죽지 않기를. 

적견이 목숨을 다하지 않기를 바랐다. 

서예염은 경찰학교를 중퇴하고, 보스의 신뢰를 얻는 데 온 힘과 노력을 기울이며 8년을 보냈다. 믿을 만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헌신적이면 된다.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시간을 쏟으면 된다. 그 얼마나 의심이 많고 예민한 사람이든간에. 부정할 수 없는 노력에는 응답하기 마련이다. 

예염에겐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시간을 쏟아 얻은 결과를 바칠 수밖에.

“내가 알려줄게.” 

“…….”  

“바뀐 거래일, 필요하지? 내가 알려줄게. 보스는 조현한텐 안 말해도 나한텐 말해.” 

“너…….” 

“초 국장한텐 안 알려줄 테니까.”

충성 같은 건 맹세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 정말 필요 없어. 

“그러니까… 죽어버릴 것 같은 표정은 하지마…” 

대신 너의……

아름다운 영화 속의 고백 장면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스크린 안에서는 총격전이 한창이었다. 피가 튀기고 총상을 입은 그가 피웅덩이 안으로 쓰러진다. 적견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예염은 아무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다리만 덜덜 떨었다. 그리고 몇 번째인지 모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적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신호를 보내.” 

초 국장이 폐기하라고 했던, 폐기됐다고 했던 그 핸드폰으로. 

“응……” 

예염은 넋이 나간 듯이 중얼거렸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내어주더라도 좋으니 이루어 달라는 소원은 결코 신이 들어줄 수 없다. 그것은 악마만이 수락하는 거래다. 

영혼을 판 자는 간절히 원하는 바를 이루지만 그 대가로 지옥에 떨어진다. 

가장 끔찍한 지옥에는 산 채로 영원히 고통받는 형벌이 준비되어 있다. 


 

7.

최연소의 나이로 반장 자리에 오른 적견은 항상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는 이 도시의 톱니바퀴였다. 적 반장의 일은 단순히 범죄를 소탕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정의감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건 이미 먼 옛날에 전부 써버렸다. 적 반장은 그림자에서 벗어난 벌레를 소탕하는 대신 어둠 속에 잘 녹아든 칼날은 대범하게 숨겨주었다. 어둠이 흘러갈 길을 만들고 그 대가로 총알을 받았다. 매끈한 은 탄환은 권총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는 이 탄환을 발사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단단히 걸어 당길 날만을 간절히 그려왔다. 단 한 순간을 위해 8년을 아낌없이 바쳤다.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면서. 

그가 경찰의 자리에 오른 건 8년 전. 경찰을 준비하기 시작한 건 그보다도 오래되었다. 그때쯤 ‘전 보스’가 초 국장의 손에 죽었다. 자겸은 단명한 아버지 탓에 이례적인 나이로 삼합회 보스에 오른 소년이었다. 적견과는 소꿉친구나 다름없었으며 가장 많이 다툰 사이이기도 했다. 그때는 적견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소년은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어서 언제나 먼저 버럭 언성을 높이곤 했다. 자겸은 그 모습을 따라하며 성질을 돋구다가 이내 웃어버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화내지 마. 어떻게 하면 기분 풀 건가. 

뭐든 하지. 

정말로 뭐든지. 

뭐든지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 말만으로도 괜찮았다. 기분은 안 좋았던 것만큼이나 쉽게 풀렸다.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이 진창에서 구르던 그를 웃게 하는 건 자겸뿐이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행복하려 했다. 적견의 과거는 지나칠 정도로 깨끗해서 자겸과의 일들은 서류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남아있지 않았다. 조현이 어렴풋하게 짐작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없던 척 산다고 해서 없는 일이 되는 건 결단코 아니다. 분명히 존재했다. 정의감도 없고 생존 욕구도 없고 명예도 바라지 않은 적견을 움직이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이제 와선 사명감 외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열렬하게 타오르던 복수의 불꽃은 온 몸을 다 태워버렸고 찌꺼기만 남아 마음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지옥’은 적견이 스스로를 위해 남긴 필름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그럭저럭 괜찮아지고 나서 적견은 어설픈 지망생 몇을 고용해 단편 영화를 찍게 했다. 초옥련의 특수부대가 남긴 전설은 공공연했으므로 영화 제작을 의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가상의 인물들을 만들어 초옥련의 활약상이 더욱 극적으로 보이도록 연출해 달라 의뢰했다. 실력이 형편없는 촬영팀은 영화를 초옥련의 영웅담이 아닌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적견이 바라던 결과물이었다. 흑백 필름에 남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현실에는 결코 없을 꿈 속의 이야기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동시에 반발심도 느껴졌다. 우리의 사랑은 이것보다 더욱 아름다웠다고, 세상에 남아 있는 기록은 전부 가짜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했다. 

그것도 옛날 얘기다. 8년 전에나 타오른 불꽃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경찰 행세가 길어지며 이제 적견은 잿더미만 남았다. 정확히 말하면 적견 이전에 존재했던 사람은 죽어버렸고, ‘사냥개’라는 명찰을 단 조직원 하나만 남았다. 그는 영혼도 이름도 과거도 버렸다. 하지만 사랑은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거사 직전 총을 손질하던 적견은 한 청년을 떠올렸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 조현이 옛날의 나와 닮았다고 하던 서예염. 초옥련이 증거품 처리를 맡긴 날 적견은 핸드폰에 남은 단 하나의 통화 기록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앳된 목소리는 낯이 익었다. 오디오 숍에서 우물쭈물하던 청년의 모습이 그려졌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초옥련이 조직에 보낸 첩자란 건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었다. 그는 경찰학교에 다니던 기억을 되살려 지퍼백 너머로 마이크를 톡, 톡, 두드렸다. 신호를 보냈다. 윗선의 눈을 피해 초 국장의 첩보원과 만나기 위해. 

극장으로 그를 부른 건 순전히 여기가 가장 안전해서였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서예염은 몇 마디 일갈하자 금세 조용해졌다. 이윽고 쭈뼛거리며 다가오더니 약간 떨어진 곳에 앉기까지 했다. 초옥련이 이런 성격의 부하를 뒀단 사실이 다소 놀라웠다. 목소리만 클 뿐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는 약골 같았다. 그러나 만남이 늘어날수록 적견은 초옥련이 서예염을 선택한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잔뜩 세운 털과 경계심 어린 눈빛은 결핍과 순수성을 드러냈다. 교활한 사람들은 예민하고 똑똑한 부하를 바라면서도 그가 자신에게 헌신적이길 원한다. 헌신을 갈취하려면 상대가 바라는 사람이 되어 주어야 한다. 결핍이 많은 사람일수록 쉬운 건 당연지사다. 적견은 초 국장을 증오했지만 그의 처세술은 써먹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인격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사람이 죽은 자리에 개 한 마리만 있는 꼴이었다. 그 투견은 무슨 방법을 써서든 첩보원을 자기 세계로 끌어들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잘라낸 지 한참인 그가 무슨 수로 타인의 호의를 얻고, 헌신을 맹세 받을 수 있겠나. 8년간 사적인 대화가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던 적견은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내뱉기 어려웠다. 곤혹스러워지면 입을 닫고 영화를 보며 다음에 할 말을 고민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그럴듯한 유혹은커녕, 스스로가 얼마나 입바른 소리에 취약한지 실감하게 될 뿐이었다. 거짓 신분 거짓 이름 거짓 세상에서 살아가는 주제에. 극장 안에서 ‘지옥’ 같은 필름을 틀어 놓고서는 진실밖에 말할 수 없다니.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말은 도무지 나오지 않아 입을 다물어 버리게 되다니 우습기만 했다.

‘됐어. 그만두자. 나답지 않은 짓은. 어차피 못 할 거.’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적견은 이 작전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서예염을 써먹는 대신 목숨을 포기하겠다고 다짐했을 때였다. 어차피 오래 살 생각은 없다. 생존율이 얼마나 더 높아지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순간 반대편에서 서예염이 손을 붙잡아 왔다.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뭐든지 내어주겠다고 호소했다. 문득 그 얼굴 위로 충성의 맹세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웃던 옛 연인의 모습이 스쳤다.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어째서. 

서예염에게 현실이 들이닥친 그 순간, 적견도 자신이 꿈 속에서 살아왔단 걸 깨달았다. 이용 가치가 없는 서예염을 꼬박꼬박 만난 것부터가 평소답지 않은 일이었다. 잿더미뿐인 마음 속에 무언가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죽으면 다 소용 없으니 죽지 말란 서예염에게 연민을 가져선 안된다. 그를 안타깝게 생각하지 말자. 다른 모든 것들처럼 대하자.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다 죽어버렸으니까. 

혼자 살아남은 걸로 이미 죄를 지었잖아. 

여생은 아무 의미 없이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톱니바퀴나 쳇바퀴처럼. 적견은 서예염을 향해 생겨난 감정들을 모아 다시 탄환으로 만들었다. 짜증 나는 조현이 이번만은 제대로 봤다. 서예염은 자신과 닮았다. 쉽게 화내고 또 쉽게 마음을 주던 예전의 나와. 그를 안타깝게 여기는 건 자기연민이므로 허락할 수 없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만은 할 수 없다.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소멸을, 세상에서 그가 사라졌음을 남겨두려면 증거가 필요하다. 적견은 자신이란 존재의 공백으로 그를 추모하려고 애썼다. 절대 변해선 안된다. 그를 부정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적견은 자신을 위한 일보다 타인을 위한 일에 더 강하게 구애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죽어버렸으니 못 박힌 인생이다. 뽑아낼 생각조차 없었다. 

총 손질을 끝낸 적견은 천천히 일어났다. 서예염은 말한 그대로 충실히 행했다. 거래일을 바꾸고, 초옥련에겐 알리지 않았다. 오늘 밤 홍콩의 부둣가에는 초옥련과 적견만 도착할 것이다. 접선지로 지목된 고층 건물을 오르면 완벽히 두 사람만 남는다. 

탄환은 8년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원수의 몫으로 한 발. 또 자신의 몫으로 한 발. 

이젠 쏘기만 하면 된다. 

 

8.

- 알겠어요. 혹시 모르니까 당신은 반대편으로 가 줄래요? 

“…내가 거래 장소에 없어도 돼?” 

- 만약을 위해서요. 당신을 의심했을지도 모르니까. 부탁 좀 할게요. 

초 국장은 언제나처럼 간단하고 쉬운 명령을 내렸다. 그의 지시는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8년간 아무도 서예염을 의심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이번 거래는 조직에서도 손에 꼽게 큰 일이었다. 더욱 신중해진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조직에는 경력 10년, 20년을 훌쩍 넘긴 베테랑들이 즐비했다. 보스의 신뢰를 받는 인물들은 예염 말고도 몇 더 있었다. 그들에게 하나하나 찾아가 장소를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초옥련의 지시에 따라, 플랜 B의 장소─실제로는 진짜 거래가 벌어지는 곳─으로 향하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초옥련은 서예염이 의심 받아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못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세영은 제 시간에 제 장소로 온 예염을 보고 그 충성을 확신할 터다. 하지만 적견의 표정이, 그가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죽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건 거꾸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불쑥 머릿속에 질리도록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 영화 속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여자는 권총을 들고 두 사람을 쏘아 죽였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하는 대사라곤 ‘드디어 덜미가 잡혔군’ 정도인 인물. 이상할 정도로 엉성하게 만들어졌다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건 그저 영웅의 행보였다. 악인을 처단하는 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근사한 모습으로 그들의 뿌리까지 태워 없애면 그만인 것을. 

긴 설명 없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거침없이 해내는 사람.

8년도 더 전에 이미 한 조직의 머리를 쏘아 떨어뜨린 적이 있는 사람. 

흰 머리칼의 인물이 탄환을 집어들며 오래도록 바라보는 장면을 좋아한다고 하던 적견.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저 외로운 마음에 홀려 눈앞을 제대로 보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이 불길한 예감을 확인해야만 했다. 서예염은 차를 미친듯이 밟아, 본래 거래 장소의 정 반대에 있는 부둣가로 향했다. 거칠게 문을 닫으며 내리자 빈 차 한 대가 보였다. 초옥련과 적견은 같은 차를 타고 왔을 것이다. 황급히 고개를 돌여 주변을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예염은 바로 고층 빌딩을 향해 달려갔다. 빌딩의 불은 전부 꺼져 있었는데 엘리베이터만 멀쩡히 가동되고 있었다. 이 또한 조직의 안배겠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빨리, 빨리. 지금 빨리 확인해야 된다고…!” 

예염은 최고층의 버튼을 연타하며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홍콩에서 손에 꼽게 빠르다는 유리 엘리베이터는 이 순간 너무나 느리게 느껴졌다. 곧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을 지나 옥상에 다다랐다. 건물 전면에 비해 볼품없는 옥상의 문은 꽉 닫혀 있었다. 양쪽으로 여는 문이었다. 꼭 상영관 같았다. 힘주어 밀어 젖히면 그 안은 눈부신 영사기의 빛으로 가득 차 있을 것만 같았다. 

“멈춰!” 

하지만 현실은 상상과는 달랐다. 

문을 열자 피 냄새가 훅 끼쳤다. 그 짧은 순간에 서예염은 온갖 나쁜 생각을 다 했다. 이윽고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 하나가 보였다. 회색 머리카락과 떨어진 선글라스. 초옥련이었다. 

“초, 초 국장……” 

예염은 숨을 들이켰다가, 문득 자신이 안도했음을 깨닫고 말았다. 초옥련은 좋은 사람이다. 두말할 것도 없는 영웅이자 정의의 편이다. 게다가 초옥련이 죽어버리면, 말소된 서예염의 데이터를 복구시켜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왜 죽은 사람이 초옥련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버린 걸까. 누가 죽지 않길 바란 건지는 자명했다. 서예염은 떨리는 몸으로 초 국장의 시신 옆에 무릎 꿇은 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은 한 사람을 보았다. 

“적견… 네가 죽인 거야?” 

“…….” 

검은 리볼버를 든 적견은 말이 없었다. 그의 옷자락에는 피가 방울방울 튀어 있었다.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그 어떤 얼간이라도 맞출 수 있는 손쉬운 문제였다. 그런데도 예염은 굳이 몇 마디를 더 물어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고 했다. 아무리 명백한 사실이라 해도. 적견이 아니라고 한 마디만 한다면. 그러면 곧이곧대로 그 말을 믿을 생각이었다.

“왜 여기로 왔나.”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적견이 물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 

“조직이 의심할 거다.” 

“나는…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해.” 

“그럼 뭐가 중요하지.” 

적견은 마음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물었다. 충격과 혼란에 예염의 호흡이 지나치게 가빠졌다. 제대로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예염은 빙빙 도는 머리를 어떻게든 가누려고 애쓰며 말했다. 

“나는, 네가 제일 중요했어. 네가 살아있는 게… 다른 것들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

“그래서… 그래서 거래 장소를 알려준 거야. 초 국장한테도 그래서 숨긴 거야.” 

“내가 죽일 걸 알고 있었나.” 

“……몰랐어.” 

“그럼 날 원망하겠군.” 

서예염은 점점 비참해졌다. 그의 말이 맞았다. 원망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이제 그는 조직으로도 돌아갈 수 없고, 경찰로 신분이 회복할 길도 막혔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숨구멍을 틀어막아 버린 꼴이었다. 그런데도. 

“……원망 안 해.”

“…….”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난 그냥 네가 살아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걸로 충분해. 이제… 다시 경찰은 못 될지도 모르지만…….” 

“…….” 

“그래도 상관없어… 너하고 있으면. 네가 살아있으면 다 괜찮아. 너도 조직원이잖아. 초 국장이 말한, 내부에 있다는 첩보원… 그거, 너지?”

적견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예염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고 외치듯이 말했다. 

“네가 경찰로 살고 싶으면, 그럼 내가 거래 현장 잡을 수 있게 도와줄게. 아니면… 나랑 같이 조직으로 돌아가. 나는 경찰이 안 되어도 괜찮으니까…”

그 말은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서예염은 무릎을 꿇은 채 적견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살아달라고. 제발 함께 있어달라고 말이다. 이 세상은 너무도 춥고 외로우니까. 살아가야만 하는 세계를 지옥이라 여기기는 싫으니까. 그러니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지만 그가 애원할 상대는 죽은 지 오래라, 간절한 기원은 허공을 맴돌 뿐이다. 

적견은 무심한 눈으로 상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어린 청년에게 동요하지 않고 감정이 움직이지 않으려면 그도 갖은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고, 8년간 장전만 해 두었던 탄환을 쏘고 나니 모든 게 예전보다 더 쉬워졌다. 이제 세상은 완전히 무채색 필름처럼 보였다. 주인공이 이미 죽어버린 세상에 그는 홀로 남아있다. 피를 뒤집어 쓰고 손가락 몇 개를 잃어버린 채 절벽에서 홀로 기어오른 것이다. 

“적견이 이름이냐고 물었지.” 

붉은 머리를 내려 묶은 남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응.” 

“넌 내가 누군지 몰라.” 

“…맞다고 했잖아. 적견이 이름이라고… 그렇게 말했으면서.” 

“그건 이름이 아니야. 이름은 이미 버렸지.” 

“그럼 뭔데? 진짜 이름을 알려줘.”

“…….” 

“진짜 네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늦었어.” 

그 순간, 말릴 틈도 없이 적견은 총구를 입에 넣고 발포했다. 순식간에 무뚝뚝했던 얼굴이 날아갔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만두라는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비명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잇새로 괴로운 신음만이 터져나왔다. 

서예염은 악마에게 적견을 살려 달라 빌었다. 다시 한 번 더 그를 보고 싶다 간원했다. 하지만 악마는 그가 언제까지 살 것인지를 정해주지 않았다. 적견은 마지막까지 진짜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보다 더 처절한 거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덜그럭, 소리와 함께 적견의 손에서 총이 떨어져 내렸다.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로 주섬주섬 총을 그러쥐었지만 탄창은 텅 비어 있었다. 그가 쏜 게 마지막 한 발이었던 거다. 차라리 죽고 싶었는데.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이윽고 주머니 속에서 휴대용 단말기가 미친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초옥련의 별동부대가 보스를 체포했고 조직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는 연락이었다. 총상을 입은 채 죽은 시신이 두 구. 그리고 권총 한 정이 그의 손 안에 있다.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그 어떤 얼간이라도 맞출 수 있을 손쉬운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서예염은 멍하니 적견의 말을 떠올렸다. 좋고도 싫어서 내 마음을 모를 때는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만 생각하려 한다고. 

나를 여기에 데려다 준 것은 무엇인가. 

싸늘하게 식은 적견의 시신을 보자 눈물이 흘렀다. 

그 어떤 맹세도 필요 없던 나는 단 한 가지만을 빌었는데.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더 팔 영혼도 남아있지 않다. 이제 남은 것은. 

 

무간지옥에 들어가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 영생이야말로 무간지옥의 가장 큰 고통이다.*

 

 

*유위강 (감독). (2002). 무간도 [영화]. 미디어 아시아 디스터비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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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 루이옌

생잭, 데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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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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