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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걸 체크메이트 어페어

Legal's Mate Affair (원제: The Thomas Crown Affair)

 뉴욕의 박물관에서 모네의 작품이 사라진다. 경찰은 소란을 일으키다 덜미를 잡힌 도둑들을 용의선상에 두고 수사에 착수하지만 억대 보험금을 배상하게 생긴 보험사가 파견한 보험수사관 클레런스 호킨스만은 이번 범죄가 억만장자인 카린 구드와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추정한다. 실제로 이번 범죄는 카린이 꾸민 일로, 그는 클레런스를 겨냥한 목적이 있어 이런 일을 꾸몄다. 클레런스는 그를 범인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고 카린에게 접근하고, 카린은 그녀에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굴면서도 속내를 숨긴다. 만남이 이어질수록 서로를 향한 열망과 의심이 뒤섞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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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 113분

드라마 · 로맨스 · 범죄

소란한 밤의 레스토랑. 테이블 사이를 한계까지 좁혀 좌석 수를 확보한, 데이트에는 적합하지 않은 호프 집 같은 레스토랑에 앉은 두 사람.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온다. 

 

카린 구드

(가볍게 훑은 메뉴판을 내린다. 시선을 웨이터에게는 잠시 스치고 곧 마주 앉은 클레런스에게 향하며 손짓한다.) 스카치. 스트레이트로 주시고, 여기 아가씨께는…….

클레런스 호킨스

(시험하듯 입 다문 채 시선을 마주친다. 의도적인 침묵.)

카린 구드

(잠시 당혹하다 곧 태연해진다. 호의로 인한 흥미를 감추느라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돌려주며 시선을 돌린다.) 여기 이 아가씨는 실은 샴페인을 좋아하시죠.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는 웨이터의 전문가다운 무심함에 존중받는다. 그가 추천한 1981년 산 샴페인까지 주문하고 나면 장내 소란 속에 고립되는 두 사람.

 

클레런스 호킨스

(언짢게 한쪽 눈썹을 올린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는, 다소 무례한 자세.) 내가 다녀간 후로 바빴나 봐요?

카린 구드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장담컨대 당신 파일이 제 것보다 두꺼울 거예요.

클레런스 호킨스

(넘어가주겠다는 듯, 혹은 당연한 사실이라고 뻐기듯) 그렇겠죠. 그 '두꺼운 파일'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실로, 당신, 유명한 요리학교에 장학생으로 진학했더군요.

카린 구드

오리건주 뜨내기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죠. 쉬웠어요. 내륙 지방 '신사'들은 소라와 봉골레도 구분 못 해요.

클레런스 호킨스

소라와 봉골레. 당신은 후자를 더 좋아하고요.

카린 구드

네, 그래요. 당신도 그렇죠?

클레런스 호킨스

(실소한다.) 이러다 내가 자주 가던 해산물 레스토랑 이름까지 나오겠군요.

카린 구드

오, 당신의 선택에 견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하는 집을 알아요. 세 블록 건너에도 괜찮은 해산물 레스토랑이 있죠. 아쉽게도 철이 아니지만.

(식전 빵을 클레런스의 접시에 덜어주고 제 몫도 가져온다.) 재학 중 어려운 부분은 화술이었어요. 먹어보면 될 것을, 근사한 설명 없이는 찍어 먹어보지도 않더군요.

클레런스 호킨스

그래서 그 가여운 요리는 어떻게 됐나요?

카린 구드

마찬가지로 가여운 어느 유학생의 배나 겨우 불렸죠. 평이 혹독했어요.

클레런스 호킨스

(시식자의 정체를 짐작하며 묻는다.) 혹독했다고요?

카린 구드

(눈썹을 팔자로 만들어 웃는다.) 맛은 모르겠고 지루하다고. 장장 두 시간 내내 맡은 냄새였거든요.

 

두 사람 모두 웃음이 터진다. 때마침 서빙 되는 술잔. 서로 편하게 마시라 권하는 모습을 비추며 사람들이 떠드는 주변 소음이 커진다.

 

 

 

이제 혼잡하고 화려한 가면을 내려놓은 뉴욕이 지루한 낮의 얼굴로 돌아와야 할 시각이었으나, 이 거대한 도시에서 가장 세계적인 미술관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기이한 도난 사건은 골목과 골목 사이를 혈관처럼 타고 흐르더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맥동시켰다. 1억 달러 상당의 가치를 지닌 미술품이 사라졌다. 그것도 대낮에, 관람객과 경비들의 눈을 피해서! 숫자 애호가와 낭만주의자 집단, 혹은 그저, 뉴욕 경찰의 무능함을 조롱할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던 뉴욕의 모범 시민들의 주목까지 끌어모은 사건 덕에 미술관은 유례없는 가십 속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비록 수십 명가량 투입된 수사 인력, 경찰 통제선과 임시 휴관 팻말이 이틀째 입구를 지키고 있긴 했지만.

“[1억 달러짜리 모네의 작품, 사라지다.] 흠, 식상한 표현이야. [현대판 괴도 뤼팽, 뉴욕에 그림자를 드리우다.]……이쪽은 신나서 소설을 쓰고 있군.”

“신문 읽을 시간 있으면 나가서 기자 상대나 좀 해, 파크먼. 방금도 담 넘다 스튜어트에게 걸린 놈이 오전에만 자그마치 둘이야.”

“걸려야 할 사람을 잘 찾아갔네. 스튜어트 형사에게 걸려야 두 번이 없지.”

자신을 향해 날카롭게 날아든 지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파크먼은 고개를 내저으며 성호를 그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대답 때문에 실랑이 벌일 시간도 아까웠던 클라인이 신속하게 호외 신문들을 압수하였다. 순순히 빼앗긴 파크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품 이름과 설명이 적힌 푯말만 남기고 캔버스처럼 새하얀 전시 벽면이 바로 그들의 정면에 있다. 그는 보란 듯이 작품명을 소리내어 읽었다. 모네, 황금빛 저녁놀에 싸인 베네치아 궁전(Venice in Twilight). 그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벽만 바라본다고 단서가 나타나지는 않아, 클라인 형사. 계속 보고만 있다간 범인 잡기 전에 내가 병원에 가게 될지도 몰라.”

“보고서에도 그렇게 쓰겠다면 선처해 주지.”

기실 파크먼의 주장도 틀리지는 않았다. 클라인은 깊게 골 패인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조사 마친 현장은 범인이 남겨둔 단서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만을 증명하고 있었다. 열을 감지하는 감시카메라에 찍힌 당시 시간대의 영상조차 대낮에 수집가 유령이 나타난 게 아니냐는 정신 나간 주장만 뒷받침할 뿐이었고.

“그래, 네 말마따나 여기서 이러는 건 시간 낭비야. 안 그래도 베이커 형사가 서로 돌아가서 근래에 열릴 경매 리스트를―.”

“농담도. 설마 그 과감한 도둑이 작품을 팔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해요?”

통제선을 넘어 끼어든 목소리에 클라인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 돌렸다. 빠르고 규칙적인 구두 소리와 함께 가까워진 여자가 악수를 청했고, 그에 응답하면서도 낯선 손님을 여과 없이 들인 순경들을 미심쩍게 바라보던 파크먼이 불현듯이 깨닫고는 탄식했다.

“하, 그렇군. 보험사가 끼어들지 않을 리 없지.”

“환영 인사 고맙네요. 파크먼 형사님 짐작대로 보험사에서 파견된 조사관인 클레런스 호킨스예요. 아직 시차 적응 중이죠.”

“멀리서도 납셨군. 어쨌거나 협조적인 협력자가 늘어나는 건 반가운 일입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마리오스 파크먼 형사예요. 이쪽은 마샤 클라인이고, 당신이 우리의 원칙을 존중하는 조사관이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 중 하나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당신들과 시답잖은 자존심 싸움할 생각 없어요. 경찰과 제 이해관계는 이미 일치해 있잖아요.”

모네를 훔친 진범을 찾는 것. 자연스러운 미소로 대답을 마무리 한 여자는 자연스럽게 두 형사 옆으로 나란히 서서 빈 벽면을 응시했다. 본래라면 이 자리에 걸려 있었을 작품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열망보다는 냉철함을 담아. 선명하지만 차가운 녹색 눈동자 아래로 긴 속눈썹이 건조한 그늘을 드리웠다.

“작품명은 굳이 다시 읽어주지 않아도 됩니다. 안 외운 팀원이 없어요. 조사관 호킨스 씨.”

“좋아요. 저도 여러분의 수고를 덜기 위해 감시카메라와 세간의 신문 기사는 모조리 확인하고 왔다고 말해두죠. 벽에서 추가적인 단서는 발견했나요?”

클라인은 솔직하게 헛기침한 파크먼을 노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정체된 사정을 완벽하게 읽어낸 여자의 입매가 승리를 확신하는 호선을 그렸다. 이런 순간에 닥쳐오는 좋지 않은 예감은 잘 들어맞는 법이다. 대대적인 개망신에, 언론가들의 광대 역할을 하는 것에 모자라 수사 주도권까지 빼앗긴다고?

“간단하게 시작할게요. 서에 갇혀 있는 용의자 중에 진범은 없을 거예요. 이 범행은 금전 목적도 아니고요. 여러분의 촘촘한 경비 포위망을 뚫고 도주할 만큼은 머리를 쓸 줄 아는 인물일 텐데, 바보가 아닌 이상 팔아먹을 목적으로 이런 판은 벌이지 않죠. 다들 느꼈잖아요? 만용에 가까운 쇼맨십.”

언성 높이지 않아도 또렷한 음성이 공간 곳곳으로 퍼져 있던 모든 이목을 제게로 집중시켰다.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저마저도 이 오만한 여자가 무엇을 발견해서 확신에 찼는지 들어나보자며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는 마당이니. 충분한 뜸을 들였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직전과 반대로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큼 조용한 음량으로 말을 이었다.

“범인은 반대로 자기 손에 쥔 금전적 가치가 조금도 아깝지 않은 인물이에요. 전 이미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거든.” 

감시카메라 영상을 다시 보러 가시죠. 여자는 미술관 주인처럼 망설임 없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수사관들은 그 뒤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뉴욕은 갖가지 사업과 자본이 흘러드는 호화로운 대도시다. 수만 명 자본가의 이름은 헤아릴 수조차 없고, 백만장자라는 단어는 그의 야심찬 후계자, 억만장자에게 밀려 죽은 말이 됐다. 일견 잔인하고 삭막한 숫자의 매트릭스matrix를 상상하기 쉽지만, 풍요로운 환경에 절은 사람들은 어디에나 널린 지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예술은 그러한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전유물이며, 뉴욕에는 그러한 망상에 사로잡힌 부자가 많았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술관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뉴욕에 생겨났다.

이른 시각, 햇살이 온실을 흉내 낸 천장의 유리 창문을 넘어 새하얀 장미 다발 위로 쏟아졌다. 과감하게도 2층의 절반을 뜯어내 1층까지 햇빛을 쏟아부은 인테리어에서는 오만함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뉴욕의 땅값과 비교할 수 있는 건 이 큰 대륙 위에도 몇 가지 없었으니까. 그 호화로운 햇살은 계단과 벽 이곳저곳에 아름답게 돋아난 백장미 덤불 위로 흠뻑 쏟아지고 있었다. 그 동화 속 성이나 묘사할 법한 아름다운 장소에 어느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와 그 일부가 되었다.

그는 이 이른 시각부터 말끔했다. 단추 두어 개는 편하게 풀어두었으나 걸친 고급스러운 옷감에 구김 한 점 없이, 누군가의 노고가 녹아 들어있는 드레스 셔츠는 깨끗한 흰색이었다. 탁자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자리에 앉은 그는 안경을 벗고 따끈한 김이 오르는 커피 잔부터 집어 들었다. 눈가의 흉터를 가리고 성실해 보이는 인상을 만들기 위해 쓰는 물건인 그의 안경은 물방울이나 김이 맺히는 순간이면 방해물로 전락했다. 인사를 주고받기는커녕 소리조차 내지 않게끔 ‘설정’된 메이드는 아침 식사를 내려놓고는 진작 떠났고, 남자는 기묘하리만치 잘 가꾸어진 온실 같은 공간에서 홀로 신문을 펼쳤다.

[1억 달러 짜리 모네의 작품, 사라지다.]

남자의 말간 두 눈이 사건의 앞뒤를 설명하는 긴 부분을 훌쩍 건너 뛰었다. 원하는 내용을 찾아 신문 위를 빠르게 굴러가던 푸른 시선이 가까스로 찾던 단어를 포착해 되돌아왔다.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주)아트 월드 보험사는 전담 수사팀을 꾸려 경찰과 협업하겠다고 발표했다’... 남자는 만족스레 입매를 휘었다. 읽었던 문장을 다시 읽는다. 남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그 뒤로 이어지는 지루한 내용을 무시했다. 신문을 내려놓은 손이 푸짐하게 차려진 잉글리쉬 브렉퍼스트도 무시하고 그 옆에 놓인 채반에서 반들반들한 사과를 한 알 집어 들었다. 아삭, 베어 무는 소리가 경쾌했다. 즐거운 아침이었다.

 

 

 

카린 구드

그럼 이번엔 당신.

클레런스 호킨스

(때마침 서빙되는 샐러드와 에피타이저 접시 세팅을 방해하지 않게끔 테이블에서 팔을 내린다.) 그래요. 내 차례군요.

카린 구드

박물관에서 아까, 당신이었다면 다른 그림을 훔쳤을 거라고 했죠. 한나 파울리, 〈아침 식사 시간〉?

클레런스 호킨스

네, 그랬죠. 내 선택에 관심이 집요한데, 취향이 궁금한 건가요? 아니면 다른 의도를 담은 조사예요?”

카린 구드

같은 말 아닌가요? 취향을 알면 감동적인 선물을 좀 더 잘 고를 수 있죠. 그래서.

(웨이터가 떠난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인다. 비밀을 이야기하듯 낮아진 목소리.) 워싱턴 주의 군인 집안, 체육계 소녀가 사랑하기엔 상당히 섬세한 그림 같은데……, 어떤가요.

클레런스 호킨스

(입매가 굳는다. 잠시 후 올라간 눈썹이 내려오며 예의 바르게 웃는다.) 좋은 눈썰미네요. 고향 집 거실에 걸릴 만한 그림은 아니죠. 난 반항아거든요. 그래서 성인이 되면서 그 집도 뛰쳐나왔고요.

카린 구드

(그 제스쳐들을 모두 아닌 척 관찰하고 선이 그어지면 더 도발하진 않는다. 몸을 물린다.) 자주적이군요.

클레런스 호킨스

(어깨를 으쓱이고 물을 마신다. 잠시 망설이다 그었던 선을 지우듯이 누그러진 대답을 흘린다.) ……사실 지금 사는 아파트에도 그 그림은 어울리지 않아요.

카린 구드

(클레런스가 선을 지워준 자리로 발부터 밀어 넣듯 서둘러 대답한다.) 뉴욕의 방은 좁고 높다란 빌딩이 해를 다 가리죠. 그런 그림이 어울리는 집은 몇 채 안 돼요. 하지만, 제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음.

(클레런스가 계속 하라고 턱짓하면 주저하면서도 마저 말을 잇는다.) ……고향은 돌아보지도 않는 당신이 매년 1월, 둘째 주에는 검은 옷을 입고 며칠이나 보낸다는 거예요. 그 그림은 아주 따뜻하고 단란한 한 장면이고.

클레런스 호킨스

(피하지 않은 시선에 여러 감정이 혼란하게 뒤섞인다. 아주 깊은 영역을 침범당한 분노와 동시에 상대를 향한 흥미, 오랜 염증, 그리고 피로.)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변덕스러운 여자일지도 모르죠.

 

침묵과 함께 서로를 응시하길 몇 분. 웨이터가 술과 음식을 준비하면서 재차 시간이 흐른다.

각자의 술잔을 집어 든다. 카린이 잔에 입 대기 전에 클레런스가 앞으로 잔을 내민다.

 

클레런스 호킨스

건배할래요?

카린 구드

(도발적인 제스쳐에 웃음을 흘린다.) 좋죠. 건배사로는 뭐가 좋겠어요?

클레런스 호킨스

(그 웃음에 한층 더 곧은 시선을 보낸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다.) 위대한 성취를 기원하며.

카린 구드

(그 정직한 기세에 외려 마음이 수런거린다. 가까스로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며) ……기원하며.

 

두 사람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잔을 부딪힌다. 이어서도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암전.
 

 

  

카린 구드는 사람들의 점잖은 박수갈채 속에 손을 내저으며 단상을 내려왔다. 제 할일을 마친 피사로의 수채화는 잠시 자리를 지키다 가장 먼저 파티장을 떠날 것이다. 값비싼 그림이 미술관 벽에 걸려 접근 금지 금줄 너머로 멀어지기 전에 가장 가까이에서 감상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 제게 인사라도 한 마디 건네어보려는 호사가들보다 먼저, 카린은 아는 얼굴을 향해 다가가 가볍게 포옹했다.

“정말 멋진 일을 하신 거예요. 구드 씨.” “부끄럽게 만드시는군요. 기증도 아니고 장기대여에 그치지 않는걸요.” “도난당한 모네가 돌아올 때까지 무상으로 말이에요. 저 그림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저와 의견이 같을 거예요. 보장해요.” 마리아 딜런은 기본적으로 무척 점잖고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리셉션 파티의 목적과 카린의 소개를 마친 그녀는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이 눈빛을 적시고 있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그녀는 이번 도난 사건에 지닌 책임 이상으로 모네의 걸작을 잃어버린 슬픔에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린은 그리 큰 친분도 없던 사이에 느끼는 어쩔 수 없는 귀찮음을 감수했다. 그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는 마음을 숨긴 그로서는 어쩌다 한 번씩 마주치는 타인의 열정이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이 열정. 이 사랑. 아무리 잘 가다듬어도 새어 나오는 마음.

“대단하시네요.”

냉랭하리만치 또렷한 목소리에 카린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마음이 흘러 넘칠 것 같았으므로. 타고난 걸로 그치지 않고 수 년 간 가다듬은 여유로운 태도가 충분한 연막으로 기능하길 바라며, 그는 뒤로 돌았다. 꿈에 그리던 여인이 차가운 미소를 띠고 서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저희 아는 사이인가요?”

“아뇨, 아직이요. 클레런스 호킨스입니다.”

그녀에게나 그렇다. 카린은 그렇군요, 하고 쉽게 대꾸하지도 못하고 조금 늦게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다. 자신의 표정이 부디 이상해보이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다행히 그녀도, 그의 주변 사람도 그가 도발적으로 접근해온 낯선 사람에게 당황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짙은 속눈썹이 음영을 드리운 녹색 눈동자에서 가까스로 시선을 떼냈다. 달리 주워 섬길 화제는, 다행히 이 파티의 시작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카린 구드예요. 그리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닙니다. 있어야 할 곳에 보낸 거죠.”

“충분히 소장한 뒤에 말이에요. 이제 질린 건 아니고요?”

예상한 대로인지 그 반대인지 알 수 없이 심장이 뛰었다. 직전까지 그와 말을 섞던 마리아 딜런이 그의 몫까지 당황했다. 들이쉬는 숨소리만으로 눈치챈 카린은 뒤를 향해 살짝 신호했다. 방해 받을 수는 없었다. 딜런도, 심지어 그를 도발한 클레런스조차 그가 무례한 일을 겪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가 평생을 기다려왔다고 해도 무방한 때였다. 무례를 당하고 있는 건 모르는 채 기만 당하고 있는 그들이다.

“자리를 좀 옮길까요? 파티에 술이 빠질 순 없죠.”

도도한 짧은 대답으로 먼저 등을 돌린 클레런스의 뒷모습을, 카린은 잠시 멈추어 서 눈에 새겨 넣었다. 아름답게 치장한 뒷모습이 꿈결 같다.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심지어 뭇 수사관들이 이따금 그러하듯 며칠이나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 꾀죄죄한 몰골로 ‘처음’ 만났어도 심장이 지금과 같이 시끄럽게 뛰었으리라고 오만한 생각을 하는 한편, 그는 클레런스가 자신의 눈에 띄기 위해 스스로를 꾸몄을 시간을 상상했다. 직전의 그 만용은 금세 철회되었다. 지금과 같이 요란하게 박동하진 않았겠다.

“보드카, 온더락으로 한 잔. 그리고 여기, 호킨스 씨는 스카치 스트레이트.”

그사이 바에 도착한 클레런스가 물 흐르듯 카린 몫의 술까지 바텐더에게 주문했다. 그는 답을 모르는 척 표정을 꾸며내고 질문했다.

“어떻게 알았죠?”

“파일에서 봤어요.”

그를 조사하고 있다, 는 말을 꾸밈도 없이 내어 놓은 여자는 곧 내어진 술잔을 먼저 집어 건배도 없이 입술을 댔다. 입안으로 흘려 넣기 전 곁눈질로 그의 표정을 확인하는 눈짓은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오히려 여유로워 보였다. 그는 되레 초조해져, 받은 술잔을 입에도 대지 못하고 그녀의 시선이 제게서 떠난 뒤에야 보이는 눈초리를, 닫히는 입술을, 머금은 술을 삼키는 목 근육의 움직임을 보느라 넋을 놓았다. 가까스로 대화를 이어가는 그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바보같이 들렸다.

“어디서 일하죠?”

“아트 월드요. 보험 쪽이죠.”

“전 이미 들어둔 보험이 있는데요.”

“오, 아닐 걸요.”

마침내, 클레런스가 처음으로 웃었다. 밝은 실내 조명을 머리 바로 위에서 받고 있는 클레런스의 속눈썹이 얇은 광대에까지 그림자를 길게 드리워, 카린은 한숨이라도 내쉬고 싶을 정도로 안타까워졌다. 당신은 왜 웃으면서도 이리 슬퍼 보일까. 그가 말문이 막힌 사이 클레런스는 승리를 향해 질주하듯 말을 보탰다.

“그 모네의 작품에 걸린 보험금의 수령자는 구드 씨가 아니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던 걸요. 그래서 제가 여기 있죠.”

“……보험수사관. 그렇군요.”

“네, 그래요. 그들이 억대 배상금에 그리 간단히 지급 승인을 해주진 않으니까요.”

다시금 잔을 기울이면 투명한 얼음이 잘그락 소리를 냈다. 그녀가 내는 웃음소리인 양 황홀하게만 들렸다. 카린은 얼음도 없이 담긴 스카치가 체온에 덥혀지는 것도 잊어버렸다. 자신이 바보같이 굴수록 그녀가 웃어준다면, 얼마든지. 자백하지 않으려면 정신을 차려야겠지만.

“그 그림의 도난에 제가 연관되어 있다고 의심하시나요?”

“의심 수준이 아니죠. 좋은 밤 되세요, 구드 씨.”

어느새 얼음만 남은 잔을 내려놓고, 클레런스는 그를 지나쳐 걸었다. 눈앞에서 그녀가 사라지고서야 카린은 겨우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클레런스 호킨스가 자신에게 주목하고 있다는 실감. 마침내 그녀와 자신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성립되기 시작했다는 확신……. 그는 너무 웃지 않기 위해 미지근해진 스카치를 한 모금 들이켰다. 한참 남은 술잔이 그대로 바 테이블에 버려지고, 그는 클레어를 쫓아 걸음을 서둘렀다.

 

 

“클레런스 호킨스 조사관.”

“이미 이야기는 파크먼 형사와―.”

“무슨 생각이었는지 변명이나 해봐. 영장 없이 체포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당신은 형사 수첩도 없잖아. 보험사가 보낸 현상금 사냥꾼일 뿐이지.”

“오, 당신들이 장장 사흘이나 억류했던 루마니아인들이 가짜 이민자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게 누구였죠? 제가 지목한 카린 구드를 제외하고 다른 적절한 용의자는 있고요?”

클라인이 분을 삭이기 위해 한숨 삼키는 습관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좌우지간 그는 형사 중에서도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클레런스 호킨스는 수사팀이 놓친 단서를 훌륭하게 포착함으로써 제 가치를 증명했다. 지목한 용의자에 관한 근거도 듣기에 충분히 설득력은 있었다. 증거도 영장도 없는 마당에 독단으로 움직인 것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나, 그는 되레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무엇이 문제라는 양 제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저는 자본가 앞에서 한없이 신중해지는 당신들의 결단을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대신, 직접 만나보기로 한 거예요. 위법 행위도 없었고, ‘당신들이 알아낸’ 수사 기밀을 누설하지도 않았는데 뭐가 문제인지 이제 말해봐요.”

“하, 정말 못 해 먹겠네. 그래서 잘나신 조사관께서는 수확을 얻었나?”

겸손이라곤 모르게 굴던 클레런스가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골몰하는 모양새에 클라인도 잠자코 그의 침묵을 기다려주었다. 보고 느낀 정보를 정리하는 과정, 그게 아니면 궁색한 변명을 쥐어 짜내는 과정 정도로 여겼을 터인데, 정작 클레런스의 반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말마따나 영장도, 형사 수첩도 소지하지 않은 그는 용의자를 직접 어찌 할 권한이 없다. 애당초 뉴욕 경찰들에게 월권행위로 도전장을 내밀 생각조차 그에게는 없었다. (마샤 클라인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 같지만) 까닭에 클레런스는 보험회사 관계자라는 신분을 이점 삼아 할 수 있는 일을 계획했다. 후원 파티에 나타날 게 분명한 카린 구드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것. 부유함이 주는 권태에 못 이겨 괴도 행위라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부자라면 뻔하다. 일단 게임판 안으로 밀어 넣어두면 마다하는 법이 없지. 이런 부류에게는 지루하게 숨죽인 추적보다 호적수를 쥐여주는 방법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리고 카린 구드는 그의 예상과 태반 다르지 않았다. 정중하고 매력적인 젊은 금융인. 농담을 좋아하면서도 거리를 준수하고, 사유 자산으로 도난당한 모네를 대신할 전시품을 기꺼이 기증하는 모범적인 시혜마저 선보이니 인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눈앞에 나타나 노골적으로 도발하는 여자에게 제법 흥미를 보이며, 아니, 오히려,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기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클레런스는 저도 모르게 올린 손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당신의 마술 속임수를 밝히겠노라 선전포고를 달성한 클레런스는 곧장 자리를 빠져나왔지만, 카린 구드가 다음을 기약하고 싶어 하는 기색을 기민하게 읽어냈다. 그리고 눈치가 있는 이상, 그게 어떤 종류의 관심인지도 모를 수는 없다…….

“있었어요.”

“고작 yes를 위해 이렇게 오랜 생각이 필요했다고?”

글쎄요. 내가 말을 아끼는 게 당신을 위한 것이기도 할 걸요. 클레런스는 빈정거림을 속으로 삼키며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는 승부사예요. 게임을 하자고 부추기니 판에 올랐고, 앞으로는 시간 문제지. 일찍 흥미를 잃지 않도록 적당히 밀고, 적당히 당기면서 퇴로를 좁혀야 해요. ……뭐, 공교롭게도 난 이런 게임을 싫어하지 않아요. 자신 있기까지 하니 잘된 일이죠.”

영 미덥지 않단 눈빛을 보내오는 클라인을 못 본 척하며 클레런스는 책상 위에 막 도착한 서류를 자연스럽게 가져갔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잡히게 될 도둑에 불과하니까.”



 

카린 구드

(메뉴판을 보며 미뤄두었던 주문을 마저 한다.) 수플레도 미리 주문할게요.

(메뉴판을 접어 다시 돌려주며 건너편 어느 한 테이블을 정중히 가리킨다. 그 테이블에 앉아있던 두 남자가 움찔 놀라더니 티나게 등을 돌리거나 고개를 숙인다. 그 꼴도 짐짓 못 본 체 한다.) 그리고 저쪽 테이블의 두 신사분께 버건디를 한 병 보내도 될까요?

클레런스 호킨스

(말없이 웃는 것으로 허락한다. 정작 그 쪽은 곁눈질도 않고선 내내 카린에게 눈을 두고 있다. 잘난 체할지, 겸손을 떨지 관찰한다. 들키리라는 예상은 있었고, 기대라도 충족된 양 만족스럽다.)

카린 구드

(태연한 투로) 고생하시니까. 적어도 저들은 이 근방 사람들 같네요. 어제 왔던 분들은 모르는 척 해드리기 힘들었어요. 노력했는데, 혹시 눈치 챘나요? 그래서 사람이 바뀌었나, 하고.

클레런스 호킨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죠. 눈치 빠른 당신을 상대하느라 얼마나 애먹고 있을지.

카린 구드

전 온실 속 화분 같은 거죠. 전부 살펴보고 있군요. 제게 곧 비밀 같은 건 남지 않을 거고.

클레런스 호킨스

(실소.) 숨겨진 부분도 있잖아요.

카린 구드

이를 테면?

클레런스 호킨스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이를테면, ‘왜’라던지.

(기대 이상의 반응을 얻은 듯, 카린이 그녀를 흥미롭게 응시한다. 원하던 반응이 돌아오자 몸을 앞으로 숙이고 속삭이듯 음량을 낮춘다.) 이제 평범한 매매로는 만족할 수 없던가요? 일탈이나, 리스크가 큰 게임판이 필요했다던지. 간혹 있죠. 지루함을 못 견뎌 쇼맨이 되기로 하는 부자들.

카린 구드

(잠자코 듣다가 입 연다.) 그게 당신의 흥미를 돋우나요?

클레런스 호킨스

(뜻밖의 반응에 살짝 당혹한다.) 무슨 뜻이죠?

카린 구드

돈 문제가 아니잖아요. 당신이 왜 현상금 사냥꾼 같은 걸 업으로 삼았는지 궁금해요. 평범한 경찰이나 형사는, 왜 아니죠?

클레런스 호킨스

(아연하다.) ……그게 당신의 지루함을 축일 수 있는 문제에 해당할 줄은 몰랐네요.

카린 구드

(꿰어본 양 거침없이) 당신은 경찰을 싫어해요. 그리고 그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얼간이를 싫어하는군요. 일탈이나, 리스크 큰 게임판을 즐기는 바보들. 그러니 제 질문도…….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의도된 지체 후에 깊은 구멍에 대고 속삭이듯이) ……‘왜’죠?

클레런스 호킨스

(한참 시선이 맞닿아 있다가 먼저 몸을 물린다.) 좋아요. 이번에는 한 수 양보하죠.

 


 

 클라인은 거침없이 문을 박차며 나섰고, 막 복도 앞에서 들어오려던 파크먼은 하마터면 활짝 열어젖힌 문에 코를 맞을 뻔했다. 사과도 없이 가버리는 뒷모습을 향해 소심하게 불평을 늘어놓은 그는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클라인의 노기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아차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미술품 도난 사건 수사가 진척될수록, 한 번씩 그 최고 공로자나 다름없는 클레런스 호킨스를 중심으로 수사팀도 잡음으로 크게 들썩였다.

파크먼은 생각했다. 호킨스가 유능한 인재인 것과 별개로 두 번 공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감상일랑 관심도 없을 클레런스는 태연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자기 반대쪽에 놓여 있던 커피잔을 들어 그를 향해 건넸다. “마실래요? 클라인 형사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어요.” “아, 그렇다면야 고맙게.” 남은 커피에는 죄가 없으니까. 파크먼은 잔을 받아 들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 잘못이 있다면 사실대로 말한 것밖에 없어요.”

“그게 정말인지는 무슨 보고였는지 들어보고 생각할게요.”

“카린 구드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어요.”

“오, 맙소사. 이건 상상하지 못했는데.”

반응이 궁해진 파크먼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손에 든 커피만 들이켰다. 지난번 카린 구드의 가택을 뒤져서 찾아낸 모네의 미술품이 정교하게 제작된 위작으로 밝혀진 이래, 바짝 약이 오를 수밖에 없었던 마샤 클라인의 기분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불이나 화약도 아니고 폭탄 발언이 투하된 것이다. 오늘은 절대 클라인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한 그는 조심히 말을 골라 입 열었다.

“이런 질문은 조심스럽지만.”

“해봐요.”

“비유로 쓴 표현이야, 아니면 진짜 ‘그거’인 겁니까?”

잠자코 듣던 클레런스가 결국 실소를 흘렸다. 저가 물으면서도 촌스럽고 민망했는지 헛기침한 파크먼은 목소리를 낮추고 재차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말하지만, 호킨스 씨. 당신이 누굴 만나러 다니는지 맹세코 아무런 관심도 없지만, 유력 용의자와 사적인 관계로 이어진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게다가 그는 당신 본인이 지목해서 용의선상에 올랐잖아요. 잊었습니까?”

“지금 순진한 게 누구람. 데이트 한 번 한다고 저랑 그 남자가 대단한 연인 사이라도 될 것 같아요? 당신 연애관이 어떤지 몰라도 전 아니네요.”

연애관 언급에 관해 항의하고 싶어 하는 파크먼의 표정을 구태여 짚지 않고, 클레런스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건 기회죠.

“카린 구드가 선사한 기회요. 동시에 절 시험하는 시험대이기도 할 테고요. 우리가 이 추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면 위성처럼 주변만 빙빙 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사냥의 미덕도 마찬가지잖아요. 결단력과 인내심.”

기어코 파크먼의 입을 다물게 만든 클레런스는 느긋하게 커피잔을 비웠다. 차라리 카린 구드에게 사심이 있는 편이 장기전을 이어가기에 편리할 것이라는 말은 속으로 넣어두기로 하였다. 이미 이건 그와 자신의 게임판이다. 관성적인 사냥 계획과는 별개로 개인적인 관심 역시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매력적이고 흥미를 돋운다. 경찰들이 들이닥쳐 생활 공간을 들쑤셔도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는 남자가 언제 그 미소를 잃을지, 온화한 처세술로 포장한 아래에 어떤 열망을 숨기고 있는지 클레런스는 알고 싶었다. 다만.

“난 내 입장을 절대로 잊지 않아요.”

반박의 여지마저 차단하는 단언이 그의 말을 묵직하게 마무리 지었다.

 

 

해가 푸르게 저문 밤, 어둠에 잠긴 집안의 공기가 차분하게 식어 가라앉았다. 경찰이 갱단처럼 무더기로 들이닥쳤던 뜨거운 한낮에도 그 주인이 여유를 즐기던 아침 나절의 온화함을 잃지 않던 공간은, 영영 따스할 것 같던 가장을 잠시 거두어들이고 민낯을 드러냈다. 물론 집의 대문은 잠겨 있었으며 집안에는 그 주인 뿐이었다.

어두운 집안에 단 한 칸, 집무실의 전등불만이 켜져 있었다. 카린은 책상 앞 의자에 바로 앉아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걱정하실 일은 없어요. 순조로우니까.”

카린 구드는 집열쇠의 홈을 엄지로 반복해서 매만졌다. 통화 너머 상대의 목소리는 그가 알아듣기에 무리가 없었지만 수화기 밖으로 새어나올 정도로 크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는 홀로 묻고 답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데이트 신청을 받아줬어요. 물론 목적은 달리 있고 클레어는 절 떠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이죠.”

말하며, 그는 손가락만으로 매만지던 열쇠를 손바닥에 굴렸다. 어둠에 익은 두 눈이 금속의 미묘하게 밝은 색을 알아보았다. 그녀에게 소매치기의 재능도 있을까.

“하지만 그건 곧 저에 대해 알게 된다는 뜻이니 이건 제게 유리한 게임이에요. 상대를 궁금해하는 건 제가 아니라 그녀예요. 전 그녀를 알고, 그녀는 저를 모르니까.”

그는 열쇠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열쇠를 배치할 가장 좋은 장소는 재킷의 바깥쪽 주머니라는 판단은 이미 내려두었다. 데이트 도중 벗어둘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그녀 어깨에 걸쳐줄 기회가 올 수도 있다. 없어졌을 경우를 생각할 때, 몸에 직접 닿는 안주머니보다 모르는 척하기에도 자연스러웠다. 첫 데이트이니 예의를 차려 정장을 고르고…….

카린은 클레어의 리셉션 드레스를 생각했다. 반짝이던 입술과 올려묶은 머리카락 아래 빛나던 한 쌍의 귀걸이를. 그 모든 치장을 무기처럼 두르고 자신을 바라보던 강렬한 시선을. 

그는 또 잠시 넋을 놓았다. 그녀가 모를 각도에서 몰래 찍은 측면 사진이나 빼돌린 증명 사진의 무감하고 우울한 눈빛과 전혀 달랐던, 살아있는 또렷한 두 눈. 뜨거우리만치 맹렬하고 두려울 만큼 반짝이던 그 두 눈. 심장이 쿵쾅거렸다. 자신은 이미 그녀를 사랑할진대 이상하게도, 새로이 사랑에 빠진 것만 같이 어지러웠다.

카린은 상기된 숨을 내뱉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그를 다그쳤다. 그는 두 눈을 감아버렸다.

“피곤해서 그래요. 아무 문제 없어요. 저는 제 역할을 절대 잊지 않아요.”

 

 

 

식사가 끝난다. 식당은 이전보다 한층 붐비고, 혼잡한 소란 속에서 두 사람은 되레 고립된다.

메인 접시를 비운 카린이 물로 입가심 하고 컵을 내려놓는다.

 

카린 구드

흠, 더 먹고 싶은 것 있어요?

클레런스 호킨스

(여지를 두듯 말꼬리를 늘인다.) 더 먹고 싶은 것이라.

카린 구드

치즈 플레이트? 아니면―.

클레런스 호킨스

(방심하기만을 기다려 허를 찌른다.) 협상은 어때요.

(제안하던 카린의 말문이 막힌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알기 쉽게 말씀드리죠. 수색영장은 또 청구할 거예요.

 

카린은 옅게 웃으며 후식으로 나온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올린다.

들뜨던 마음이 식으며 상심한 그는 이어지는 클레런스의 의욕적인 도발을 흘려 들으며 에스프레소를 홀짝인다.

 

클레런스 호킨스

(그가 지레 허를 찔려 태연을 가장한다 생각해 밀어붙인다.) 지난번처럼 어설프게 돌아갈 거라고도 생각하지 말아요. 집안이 엉망이 될 텐데―.

카린 구드

(양해를 구하듯 손가락을 들며 에스프레소 잔을 내린다.) 괜찮다면. (클레런스가 말을 멈추고) 아주,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될까요?

클레런스 호킨스

(선심 쓰듯) 해봐요.

카린 구드

커피 한 잔 더 할래요?

클레런스 호킨스

(의아하다 곧 놀란다.) 한 잔 더?

카린 구드

(빈 잔을 보여준다.) 괜찮다면, 한 잔―.

클레런스 호킨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게 제 의심과 맞아 떨어지면 아연해진다.) ……아, 그것 참 개인적인 질문이네요.

카린 구드

(그 의심을 확인시켜주듯이) 네. 마실수록 좋아질걸요. 보증하죠.

클레런스 호킨스

실례지만. (절반 가량 남아있던 자신의 커피잔을 비운다.) 나도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카린 구드

(커피 포트를 만져보고 온도를 확인한다. 아직 충분히 따뜻하면 손을 물린다.) 그럼요. 얼마든지요.

클레런스 호킨스

내가 용의자와 데이트도 할 거라고 생각해요?

카린 구드

(웃음을 흘린다. 질문의 내용보다는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어린 기분이 예상대로라.) 커피 얘기였는데.

(고개를 들면 탐색하는 듯한 클레런스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고, 커피포트를 집어 든다.) 전 제안했고, 당신은 두 가지 중 고를 수 있어요.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거나.

클레런스 호킨스

(눈썹을 까딱 올린다. 이후 탐색하는 긴 응시. 상대는 피하지 않는다.) ……에스프레소를요.

카린 구드

에스프레소를요.

 

클레런스는 내내 쥐고 있던 커피 잔을 검지 손가락의 손톱으로 톡, 톡, 두드린다.

주변 소음에 묻혀 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카린의 속내를 헤아려보려는 시도 끝에 클레런스는 부러 눈 접어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인다.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일까.

 

클레런스 호킨스

(주변 소음을 의식해 크게 목소리를 틔운다.) ……좋아요. 마실게요.

 

기대한 대답이 나오자 마주 눈 접어 웃는 카린. 클레런스의 커피잔을 먼저 채우며 무언가 말하지만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클레런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웃으며 대답하고 카린이 자신의 잔도 마저 채우면서 화면 페이드아웃.

컨텐츠 정보

출연

클레런스 호킨스

Clarence Hawkins

제작

라히네, 마바

카린 구드

Karine Go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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