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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규율에 따라 한 명만이 살아남습니다.”
트로카데로 광장의 테라스 위에 길고 무거운 테이블이 놓였다. 안개가 짙게 끼어 하늘은 잿빛에 가깝고 에펠탑은 색이 바랬다. 장례식이 어울릴 날씨. 테이블 위로 24장의 철제 카드가 깔리는 동안 라파엘 아나스타시아는 이런 카드 뒤집기 같은 복잡한 짓거리 대신 동생과 자신의 사이에 관을 내리고 서로의 멱살을 잡아 구르는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악쓰고 무시하고 파괴하며 벗어났던 규율 아래 다시 목을 누이며 돌아온 이유가 제 동생을 죽이고 영원히 가족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욕지기가 튀어나올 것 같다.
카드를 먼저 선택할 권리는 미카엘 아나스타시아에게 있었다. 곧 첫 번째 질문이 떨어졌다.
결투의 시간은 언제가 될 것인가?
“일출.”
“지금.”
흰 속눈썹 아래로 미카엘의 시선이 라파엘을 향한다. 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검은 눈, 이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운 짓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견디고 싶지 않다는 듯 찌푸린 미간. 그러나 미카엘은 더 확실한 결과를 위해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제 누이보다 더 잘 알았다. 검은 장갑을 낀 손끝은 카드 하나를 명징하게 지정하고, 미카엘은 단지 일출까지의 계획을 생각한다. 해가 뜨는 직전까지 덫을 짜고 라파엘의 목을 조이리라.
양측의 카드가 열린다. 미카엘 94, 라파엘 68. 일출로 결투의 때는 정해진다.
장소는 어디가 될 것인가?
“사크레쾨르 성당.”
“사크레쾨르 성당.”
장소만은 겨룰 것도 없이 정해져 있었다. 나의 아들딸 중 하나만이 살아남아 모든 것을 물려받으리라, 남매의 아버지이자 조직의 수장이었던 그 남자가 선언했던 때에 이미 그들의 운명이 그곳에서 정해졌다. 그 목소리가 울리던 성당의 높디높은 천장과 파리가 내려다보이던 몽마르뜨 언덕을 기억한다. 기어이 끝을 맺는다면 그 자리여야 한다는 걸 남매는 합의했다.
무기는 무엇을 쓸 것인가?
“권총.”
“맨손.”
라파엘이 미카엘의 손을 힐끗 바라본다. 방아쇠에 걸리는 검지의 마디에 박힌 굳은살을, 달리면서도 수십 미터 떨어진 곳의 바늘귀를 쏘아 맞힐 수 있던 동생의 솜씨를 생각한다. 저 애를 상대하기 위해선 몸을 낮추고 달려들어야 한다. 총을 빼앗고 맨몸으로 얽혀야 한다. 맨손이라면 얼마든지, 저 애가 발버둥 쳐도 놓치지 않고 숨을 조를 자신이 있었다. 뼈가 부서지도록 으스러지게 껴안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카드가 열리면 숫자는 미카엘 78, 라파엘 67. 무기는 권총으로 정해진다.
규칙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자비 없음.”
미카엘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라파엘은 미카엘의 차가운 입술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내 손으로 혹은 네 손으로 기어이 끝을 보아야겠어? 라파엘 자신도 이것을 매듭지으러 왔으면서도, 맞은편에 앉은 동생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시신경이 뜨겁고 머릿속이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대답하지 않는 누이의 낯에 미카엘의 시선이 닿는다. 아, 누님. 뭐가 그리 화가 나십니까? 이 세계를 떠나겠다고 선언했을 때 이미 당신이 나를 배신했고 그때 이미 모든 것은 끊어졌다는 것을 당신만이 모르십니다. 미카엘이 눈꼬리를 휘며 웃는다. 뜨거운 숨을 지리멸렬하게 토하며 라파엘이 중얼거린다.
“자비 없음.”
모든 것이 정해졌다.
일출, 사크레쾨르, 결투 권총, 자비 없음.
*
자비 없음. 살아남는 이가 모든 걸 가질 것이다.
미카엘은 이 오래된 규칙을 다시 생각한다. 왜 따르지 않았습니까, 누님. 규칙은 처음부터 똑같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라파엘이 결투를 거부하고 도망친 탓에 이 처음의 자리로 돌아오는 데까지 너무나 긴 시간이 걸렸다.
해가 뜨지 않은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앞, 체스판 위의 말처럼 사내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서 있다. 도전자와 도전받은 자를 위한 두 자리가 나란히 놓여 있고 그중 하나의 자리엔 이미 미카엘이 앉아 있었다. 라파엘이 계단을 걸어 올라오기를, 아니, 정확히는 누이가 도축장을 향하는 짐승처럼 질질 끌려 이 앞에 놓이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라파엘 아나스타시아는 두 발로 걸어 도착한다. 검은 지평선에 붉은 태양이 금을 가를 때 라파엘은 계단의 마지막 다섯 걸음을 걸으며 이 거추장스러운 재킷을 벗어버리고 내던진다. 벨트를 풀어버리고 떨구면 묶어둔 탄창들은 대리석 바닥 위로 동전처럼 떨어져 내린다. 넥타이를 헤쳐내고 단추 두어 개를 뜯어내듯 여는 꼴에는 최고 회의 결투에 대한 존중 따윈 티끌만큼도 비치지 않았다. 셔츠 앞섶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붉은 얼룩이 물들었으나 라파엘은 그 또한 개의치 않는다. 총신이 뜨겁게 달아오른 권총마저 거추장스럽다는 듯 내버리면 이제 라파엘은 맨손에 개줄만을 쥐었다.
황제의 권한을 쥔, 재판관이자 배심원이자 집행자인 동생과 또한 그 고상하신 최고 회의의 전령이 라파엘 아나스타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그들이 조금 더 기다리도록 내버려두고 잠시 자신의 개를 돌본다. 이 계단 층 꼭대기까지 함께 오르느라 더운 혀를 빼물고 할딱거리는 개 앞에 잠시 무릎을 낮추고 앉아 목걸이를 풀어주었다. 귀 뒤를 긁어주고 머리를 쓸며 고생했다, 요놈, 어르면 이해하지 못한 개는 여전히 자신을 따라오려 한다. 결국 쉿, 쉿, 쫓는 소리를 몇 번을 내고 엉덩이를 토닥여 멀리 보냈다.
해가 뜬다. 골목의 구석구석으로 해가 내리고 죽어나간 몸뚱이들 위로도 붉은 빛이 닿았으리라. 라파엘은 시체를 쌓으며 평야를 돌았고 그러나 기어이 돌아왔다. 자기 손목에 개줄을 둘둘 둘러 묶인 채 약간의 절룩이는 걸음으로 라파엘은 지긋지긋한 결투의 빈자리에 선다.
“오셨군요, 누님.”
미카엘은 정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 편에 선다. 누이의 목숨을 거두는 것은 마땅히 자신이어야 했으니, 대리인을 세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서로의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지면 라파엘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집에 왔군. 내가 기어이 집에 돌아왔어.”
전령이 고했다.
당신들의 영혼을 신에게 바칩니다.
시작한 바와 같이 끝나리라. 재는 재로 흙은 흙으로.
각자의 자리에 서면 30보.
거리가 꽤 멀기에 대화하려면 목소리를 꽤 높여야 했다.
“미카엘, 내가 왜 떠났는지 아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첫 총성이 터졌다. 미카엘은 왼쪽 어깨를 움켜쥐고, 라파엘은 옆구리에 손을 댄 채 욕설을 내뱉는다. 다음의 발포를 위해 걸음을 내디디면 발목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질척하게 미끄러졌다.
20보.
“이 꼴을 하고 싶지 않아서…, 죽기 싫어서 튀었다, 이 새끼야. 물론 아내도 있고 개도 있었지. 하지만 그런 건 다 부수적인 거야, 결국은 이 꼴이 나고 싶지가 않았다고. 살고 싶었다고.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냐? 좀 살자고!”
“닥치세요.”
두 번째 총성이 울린다. 라파엘의 왼쪽 어깨에 총상이 하나 더 더해지고, 몸이 휘청이며 한쪽 무릎이 꺾인다. 미카엘은 그대로 서 있었다. 라파엘이 비틀거리는 팔꿈치로 땅을 짚고 겨우 일어났으나 숨소리는 이미 거칠게 갈라지고 있었다. 다음의 총알을 채우는 라파엘의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사이 미카엘은 마지막 탄알을 라파엘의 어디에 쏘아 맞힐지를 생각한다.
10보.
“후… 미카엘.”
“누님. 목숨을 구걸하기엔 늦었습니다.”
“내가, 살고 싶었는데, 또 그것만큼이나 중요했던 게…”
세 번째 총성이 울린다. 총알은 라파엘의 가슴팍, 어쩌면 심장 언저리에 박혔다. 라파엘의 흰 셔츠가 완전히 붉게 물들고 바닥까지 피가 튄다. 미카엘은 자신의 사지와 손끝을 확인하지만 새로 더해진 총상은 없었다.
미카엘이 10보를 더 걸어 다가간다. 반면 라파엘은 명백히 죽어가고 있다. 떨군 고개, 검고 곱슬거리는 머리칼은 피에 젖어 엉켰고 짙은 눈썹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경련하듯 깜빡이는 검은 눈, 헐떡거리는 거친 숨소리. 피에 젖은 땅이 검게 뭉치고 밀고 나아가는 바닥에는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이미 온전한 10보를 셀 수 없었으나, 네발로 기고 양손으로 바닥을 긁으며 미카엘 아나스타시아의 무릎 아래까지 다가오는 라파엘 아나스타시아. 그 광경을 관망하며 미카엘이 느리게 숨을 정돈한다.
“목숨이 질기시네요, 누님.”
“... … 미…카엘.”
그 떨리는 손은 이미 다음 발을 장전하거나 총을 쥐거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기도 버거워 보였다. 미카엘은 기꺼이 몸을 낮추고 누이가 마지막 유언으로 무엇을 남기는지 귀를 기울여 보기로 한다. 걸음은 이미 0보. 서로의 사이에 한 걸음의 여백도 남기지 않고 겹치듯 가까워진 채였다. 언제든 마지막 탄환으로 누이의 숨을 끊을 수 있도록 총구는 라파엘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으면서도, 방아쇠는 당기지 않은 채 미카엘은 기다렸다.
라파엘이 총을 놓친다. 총 없이 펼쳐진 손바닥은 도리어 미카엘의 손등 위로 겹쳤다. 어쩌면 미카엘의 손목을 꺾거나 총을 빼앗고 싶었을까? 그러나 겹친 손에선 어떤 완력도 느껴지지 못했고, 단지 미지근하게 식어가는 체온과 끈적거리는 피만이 선명했다.
이 거리는 지나치게 가깝다.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을 만큼.
라파엘의 입술이 달싹인다. 보고 싶었다는 말인가? 목숨을 구걸하고 용서를 구하는 말인가? 미안하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인가? 혹은 그저 지독한 원망과 저주의 말인가? 누이가 말하는 그 작은 속삭임에 미카엘은 귀 기울인다. 라파엘의 속삭임은 오로지 미카엘에게만 들리고, 주변이 고요해진다. 다른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라파엘의 숨소리와 그 검은 눈동자가 세상을 채운다. 지평선까지 날아간 새도 기어이 쏘아 맞히는 미카엘 아나스타시아의 그 집중력과 예민한 솜씨가 누이의 죽음에 몰입한다.
라파엘 아나스타시아가 이곳을 떠나 도망쳐 자신이 바라볼 수 없는 어떤 외지고 평온한 곳에서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호숫가의 평화로운 집과 사랑하는 이들이 둘러앉은 식탁, 발치에 앉아 꼬리를 흔드는 개. 그런 것이 당신에게 어울릴 리 없지 않나. 이 삶에선 가족을 향한 애정조차 관 앞에 떨군 고개에서만 허락되고, 우리가 함께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든 공기 중에 유황 내가 떠돌 것이다. 쏘아 죽이고서야 무기를 놓고 겹칠 수 있는 양 손과, 체온이 식어갈 때쯤에야 끌어안을 수 있는 몸뚱이. 그 이상의 자유는 아나스타시아에게는 결코 허락될 수 없지 않나.
겹친 손이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라파엘의 검은 머리칼이 미카엘의 발치에서 붉게 엉긴다. 제 손등에 남은 손자국을 잠시 바라보다, 미카엘은 누이의 목에 손을 짚어 맥박을 재어 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카엘은 누이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다.
시체를 거두는 것은 미카엘이 직접 손 썼으며, 라파엘의 총을 거두는 것 또한 미카엘의 몫이었다. 거둔 총의 실린더를 열어보면 라파엘에겐 총알 한 발이 남아있었다. 애초에 누이가 마지막 탄환은 쏘지 않았다는 것을 미카엘은 알았으나, 힘이 빠졌던 탓일지 방아쇠를 당길 생각이 없었던 것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라파엘 아나스타시아, 묘비의 성씨는 틀림없이 새겨졌고 시체는 가족 묘지에 묻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