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이란 뭘까.
레비는 평생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단테와 있다 보면 가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집에 살고, 비슷하게 자고 일어났으며,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트럭 이야기를 하거나, 같이 식물을 가꿨다. 이건 TV에 나오는 평범한 가족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물론 레비는 엄마와도 비슷하게 같이 살고, 자고, 식사하며, 인사했다. 하지만 결국 엄마가 죽기 전에 택한 것은 자신이 아닌 키르마의 남자였다. 그 남자 때문에 집이 박살났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 순간 레비는 이런 게 진짜 가족일 리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진짜 가족은 무엇인가. 그 의문을 품은 채 레비는 오늘도 식탁 앞에 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얼빠져 있어.”
“아니, 그냥~”
“실없긴. 자.”
단테는 시리얼이 담긴 접시를 레비의 쪽으로 슥 밀었다. 레비는 익숙하다는 얼굴로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접시에 부었다. 오늘은 <클리닝> 의뢰가 없단 것을 빼면 평소와 다름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단테의 움직임도 평소보다 느긋했다. 그건 정말이지 다행인 일이었다.
"단테 씨는 가족이 뭐라고 생각해?"
"쿨럭, 쿡, 무슨, 갑자기 무슨 질문이야, 그게."
평소처럼 급하게 시리얼을 퍼먹었다면, 단테는 레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시리얼이 목에 걸려 한참을 기침했을 테니 말이다. 단테가 체면을 구길 위기에 처하거나 말거나 레비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그냥, 아침에 갑자기 생각나서~"
"그래서 방금 전까지 얼빠져 있던 거군?"
"또 말 돌린다, 또. 그래서 뭐라고 생각하는데?"
"질문 상대를 잘못 골랐어."
"에, 그치만 여기 단테 씨 말고 물어볼 사람이 없잖아?"
"안 물어보면 되지."
"궁금하단 말야."
"뭐가. 가족이라는 게?"
"응."
"하아……." 이쯤 단테는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마찬가지로 레비 역시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고 의기양양하게 미소지었다.
단테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가 말했던 대로, 자신은 이런 질문에 대해 제대로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테는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다. 니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굶어 죽었거나, 뒷골목의 부랑아처럼 정처 없이 떠돌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빌어 먹었을 테다. 그렇게 단테는 살기 위해 <클리너>가 되었지만, 우습게도 <클리너>이기 때문에 가족을 만들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상대를 위해서도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이 가족에 대해 운운하다니. 마치 운전대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놈이 트럭을 몰겠단 이야기나 다름없지 않은가.
"……같이 살고."
"그럼 뭐, 룸메이트 관계인 사람들도 다 가족이야?"
"기다려봐. 생각 중이니까."
"같이 살고, 또?"
"하아……." 단테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미간을 팍 찌푸렸다. 어느덧 시리얼이 우유를 잔뜩 머금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것 뿐? 그럼 나랑 단테 씨도 가족이야?"
"아냐, 깨달았어. 이딴 쓸데없는 질문에 대답해주고 있는 걸 보니, 가족이라는 건 대충 뭐든 들어주고 싶은 사이인가보군."
"반박하는 거야, 가족이라는 거야?"
레비가 질문했지만 단테는 눅눅해진 시리얼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마구 떠먹기 시작했다. 아무튼 밥 먹을 때 괴롭힐 수는 없단 생각에, 레비는 우선 넘어가기로 했다.
"뭐, 단테 씨는 내 말 잘 들어주긴 하지."
"그래. 노력 중이야."
"다 들어주려고?" 레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단테를 바라보았다. 물론 단테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친하지도 않았던 레비를 데려와 집에 머물게 해 줬고, 밥도 원하는 만큼 차려 주었으며, <클리닝> 기술까지 레비에게 전수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레비는 쉽사리 단테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레비가 언제나 바랐던 것. 가장 강렬하게 원했던 것.
"그럼 내 의뢰도 받아주면 안…”
“싫어.”
그것만큼은 단테가 늘 외면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듣지도 않았으면서!?”
“키르마는 거절한다고 했을 텐데.”
“왜?”
“못 해.”
“겁 먹었어?”
“하아…”
단테는 질린다는 듯 접시를 정리했다. 거 봐. 레비 역시 기대하지 않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늘 분위기가 괜찮다가도, 의뢰 얘기만 꺼내면 퓨즈가 나간 전구처럼 단번에 싸늘해졌다. 레비는 이럴 때마다 배신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의 ‘못 해’는 마치 주제를 파악하라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벌써 이게 몇 번째더라. 레비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더 바라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 배 굶고 추울 일은 없을 텐데. 그저 얄팍한 친절에 기대 적당히 편하게 살면 피차 좋을 텐데. 좋아하니까 원하고 원하니까 불행해진다. 레비는 이 굴레를 끊어낼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겁 먹었어.”
“그러니까 귀찮게 부탁하지 마.”
“앞으로도 평생 그 의뢰 받을 일 없을 테니까.”
레비가 대답하지 않자 단테는 말 없이 시리얼을 담은 접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배 째라는 듯한 뻔뻔한 태도는 분명 단테 자신이 이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알기에 나오는 태도였다.
“말을 왜 그렇게 해?”
자신은 언제나 입을 다물어야 했고, 순응해야 했다. 이 집에 계속 머무는 한은.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잖아.”
“진짜야.” 단테는 적당한 투로 답했다.
“왜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 거야?”
“그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
그래서 레비는 단테의 품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한다면 분명 단테의 대답은 평생 듣지 못할 테지. 그래도 상관 없었다. 어차피 머물러도 답을 못 듣는 건 똑같을 테니까. 떠나겠다고 결심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게다가 해야 할 일까지 명료해졌다.
“……알겠어. 그럼 나도 갈게.”
“하?” 단테는 이게 무슨 반항이냐는 표정으로 레비를 바라보았지만, 레비는 일절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여기 있어야 할 이유도 없잖아.”
“따지자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는데.
“단테 씨랑 가족 놀이 하느라 잊고 있었네.”
레비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집을 나설 작정이었다. 단테가 뒤에서 "이봐, 레비." 하고 불렀지만 레비는 꿋꿋했다. 방으로 들어가 가방에 옷가지 몇 개를 쑤셔넣는 동안에도 단테는 계속 성을 냈다. “왜 난리야.”, “얼른 내려놔.”, “난 화 안 났으니까.”, “현명하게 생각해.”…
레비는 결국 참다 못해 말했다.
“내가 화 났다고. 내가.”
“그래서 나간다고?” 화가 난 건 단테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 귀찮게 해 줄게.”
“의뢰만 안 부탁하면 돼.”
“계속 의뢰할 거야. 단테 씨가 거절하더라도, 쭉 그럴 거야. 왜 거절하는지 이유라도 알고 싶거든.”
“…….”
단테는 침묵했다.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어쩌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저렇게 입다물 수도 있겠다고 레비는 생각했다. 가벼운 짐가방을 챙겨 든 채 레비는 걸음을 뗐다. 단테를 스쳐 지나가 현관까지 간 후 미련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쾅! 소리와 함께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쩐지 반항에 성공한 기분이었지만, 홀가분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아주 슬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상적인 감각에 가까웠다. 평소처럼 화분의 이파리를 닦고, 청소를 하거나 환기를 하는. 평범한 일상. 이제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좀 서러웠지만, 원래 없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 정도는 견딜만 했다. 그늘진 골목. 사람들은 전부 시가지로 빠져나간 조용한 거리를 걸으며, 레비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총이 손가락에 부드럽게 걸렸다.
알려줘서 고맙다고. 그 말 정도는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었다. 이미 저버린 사람과, 저버린 연. 그것들을 남겨두고 레비는 복수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기에. 그에게 주어진 건 성공과 죽음, 오직 두 가지의 결말 뿐.
그렇게 레비는 키르마를 향해 나아갔다.
* * *
오르카 키르마의 인생이 이렇게까지 침범당한 건, 단언컨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키르마는 이미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니나는 보스를 노리진 않았지만 그만큼 노련한 사람이었다. 그는 키르마 내에서도 손꼽히는 인맥을 지녔고, 그것은 그대로 니나의 장남인 오르카의 강점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니나의 사업장 중 하나를 물려받아 공격적으로 마케팅해 세력을 불렸다. 그는 다소 과격한 편이었으므로, 감히 오르카를 건드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조직 내에서 그 누구도 없었다.
“형, 그 여자가 가. 피ㅎ…”
바로 오늘, 자신이 애지중지 쌓아올린 금자탑을 단번에 망가트린 어떤 여자가 등장하기 전까진.
‘탕!’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열화된 격발음과 함께 데비 키르마의 목소리가 끊겼다. 오르카는 그제야 난생 겪어본 적 없는, 실재하는 공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뼈가 굵은 마피아로서 그는 많은 싸움을 겪었다. 키르마 간의 항쟁. 다른 마피아와의 결투. 그곳에서 삼형제는 언제나 살아남았다. 비열하고 야비한 방식이어도 상관 없었다. 그렇게 비난할 사람들은 이미 죽어 입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르카는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 일도 아주 야비하고 비열하게, 그렇지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비는 마치 그렇겐 안 된다는 듯 자신의 부하들을 하나 하나 쓰러트렸고, 종내에는 삼 형제 중 두 명을 잡아 죽여버리기에 이르렀다. 공포가 뱀의 독처럼 서서히 다가왔다. 오르카는 그걸 떨쳐내기 위해 우선 위스키를 한 모금 거칠게 들이켰다.
몸에 알콜이 돌기 시작하니 의식이 명징해졌다. 그는 곧장 시가를 입에 문 채 권총 여러 개를 챙겨 안주머니에 마구 쑤셔넣었다. 잡념이 사라진 자리엔 오직 ‘레비를 죽여야겠다’는 생각만 들어찼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클리너> 역시 불러두었다. 오늘은 정말로 기묘한 하루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게 순리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마치 복수의 여신이 축복을 걸어주는 것처럼.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성호를 그은 후, 방문을 열고 나왔다.
오르카, 데비, 유조의 아지트는 목조 인테리어로 꾸며진 가정집을 무역 회사의 사무실로 개조한 공간이었다. 1층은 로비 겸 응접실, 2층은 간부들의 사무실, 3층은 형제들의 사무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마치 회사 건물보단 작은 숙박업소처럼 보이곤 했다. 오르카는 권총 방아쇠에 검지를 건 후 차근차근 방문이 일렬로 늘어선 복도를 걸어 나아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인지라 각 층은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했으며, 복도의 펜스 너머로 아래층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들어왔다. 생각했던 위치에 도달한 그는 숨을 죽인 채 바닥에 바짝 엎드려 2층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
끼익, 끼익. 사람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낡은 나무 틈새가 벌어지는 마찰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이 집의 주인은 그게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라는 걸 금방 눈치챘다. 분명히 그 여자로군. 오르카는 생각했다. 그는 엎드린 채로 포복해 복도의 가장자리로 나아갔다. 고개를 빼꼼 내밀자 아래층에서 총알을 갈아 끼우는 레비의 모습이 보였다. 간단한 정비를 마친 후 이곳까지 올라올 속셈이겠지. 오르카는 레비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비늘처럼 빛나는 검정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 키, 체형, 걸음걸이까지 전부, 처음 보는 사람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전문 클리너인가?
그렇다. 레비의 마음엔 빌어먹을 삼형제가 언제나 시리게 도사렸으나, 정작 그 삼형제의 장남은 레비를 일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오르카에게 레비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인생을 망가트린 폭풍같은 여자. 그 뿐이었다. 그렇기에 오르카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어떤 뉘우침이나 깨달음도 없이, 레비가 계단을 오르기 전에, 오로지 레비를 죽기 직전까지 최고로 고통스럽게 만들겠단 생각으로, 그대로 복도 펜스에 굴러 부딪힌 후 정확하게 아래층에 있는 레비를 향해 떨어졌다.
쿵!
“이건 또 뭐야!”
나무 조각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레비가 위를 올려다봤고, 그는 곧장 떨어지는 오르카와 마주했다. 다행히 잽싸게 반응해 오르카에게 완전히 깔려 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바닥과 부딪혀 큰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두개골이 심하게 흔들려 눈 앞이 어질어질했다. 그 와중에 오르카는 레비의 위로 올라타 어깨를 짓누르며 그를 압박해왔다. 둔한 충격이 뼈 마디 사이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레비는 곧장 다리를 휘둘러 오르카카의 정강이를 강하게 가격했다.
“윽…!”
오르카는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했다. 잇새로 빠져나오는 숨 사이로 독한 위스키와 씁쓸한 시가의 향이 뒤섞여 있었다. 어쩐지 레비는 고양감을 느꼈다. 힘이 빠진 찰나를 놓치지 않은 채 그대로 오르카의 품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르카는 권총의 손잡이로 레비의 후두부를 가격했고, 레비는 곧장 주먹을 뻗어 그의 뺨을 후려쳤다. 두 사람은 총을 꺼낼 틈도 없이 가깝고 빠르게 붙어 주먹을 주고받았다.
“여기까지 오다니. 의지 하나는 칭찬해주지.”
“네가 만들어준 거야.”
“그런데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군?”
“하? 원수?”
오르카의 비아냥에 레비는 결국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트렸다. 그 동요를 놓치지 않고 오르카가 레비를 가격하면, 레비 역시 피하지 않고 오르카에게 한 방 더 먹이는 식이었다. 입술이 다 터져 피가 흐르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거나 무너진 가구에 살이 찢겨도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서로 죽도록 몸싸움을 하다가 결국, 레비는 오르카의 멱살을 붙들고 창가의의 벽으로 몰아붙였다.
“너 날 기억해?”
레비는 모든 울분을 가라앉힌 채 차분하게 물었다. 그 질문에 오르카는 가만히 레비를 응시하기만 했다. 마치 이런 질문은 익숙하단 것처럼 고요한 얼굴이었다.
“대답하기 전에, 나도 묻지.”
“…….”
“로시를 알고 있나?”
“그게 누군데.”
“그렇다면 데비는. 유조는?”
“전혀.”
“나도 마찬가지다. 네가 네가 죽인 내 부하와 동생들을 기억하지 못하듯, 나 역시 너 따위 알 게 뭐냔 말이다.”
“……그럴 줄 알았어.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고.”
레비는 냉소적인 얼굴로 뒷주머니에서 총을 꺼냈다. 한 손으론 여전히 오르카를 압박한 채, 나머지 한 손으로 침착하게 안전고리를 풀고 총을 장전했다. 그런데 오르카의 반응이 이상했다. 마치 죽음을 받아들이고 해탈한 것처럼 씨익 웃더니, 그대로 실성한 것처럼 깔깔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하, 하하하, 하하!”
“이게 진짜 정신이 나갔나?”
“아니, 난 지극히 제 정신이다만?”
“그럼, 뭐. 미친 척이라도 해서 죽을 시간을 1초라도 더 늦추려고?”
“하하… 그게 아니야. 아무래도 승리의 여신은 내 편인 것 같군.”
그 말과 동시에 철컥, 하고 싸늘한 소리가 레비의 목 뒤에서 들려왔다.
레비는 깜짝 놀란 채로 뒤를 돌았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단테였다.
“단테 씨…?”
단테는 대답 대신 레비의 팔을 붙들어 안은 후, 자신의 쪽으로 당겨와 몸을 포박했다. 관자놀이에는 총을 댄 채였다. 그 꼴을 보며 오르카는 과장된 한숨을 쉰 후 극적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하하! 정말 재미있는 광경이군.”
“단테 씨, 단테 씨가 왜…?”
단테는 무언극에 오른 배우처럼 아무 말도 없었다. 레비는 충격에 반항하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그는 단지 고개만 돌려가며 오르카와 단테,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답은 단테가 아닌 오르카로부터 나왔다.
“왜긴, 그는 ‘키르마’니까.”
“뭐…?”
“네가 저 <클리너>와는 무슨 사이인진 모르겠지만. 저 자는 우리 ‘키르마’에게 맹세를 약속한 자야. 그러니 나의 말을 들을 수밖에.”
“…….”
레비는 오르카의 말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어려운 내용은 없었다. 게다가 오르카의 말이 진실이라면 해결되는 의문도 많았다. 왜 단테는 나를 거뒀는지. 왜 나랑 매번 싸우면서도 나를 곁에 두었는지. 그렇게 아끼는 체 하면서도 왜 키르마를 죽여달라는 의뢰는 받지 않았는지. 여태 레비를 답답하게 했던 모든 질문의 답이 한 번에 나오는 셈이었다. 레비를 감시하기 위해 거두고, 곁에 두었으며, 키르마이기에 키르마를 죽이라는 의뢰는 받지 않는다. 명쾌했다. 하지만 레비는 믿을 수 없었다. 그 말대로라면…
“다 거짓말이라는 거야?”
“…….”
“단테 씨. 전부 거짓말이야?”
“…….”
“뭐라고 말 좀 해봐!”
여태 자신과 단테가 지내왔던 시간들이 전부 가짜라는 의미니까. 그래서 레비는 모두가 가리키는 정답을 외면한 채 그저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목 뒤로 다가오는 차가운 총구가. 자신을 결박하는 그의 단단한 팔이. 기분 좋게 찢어지는 오르카의 웃음소리가 이 비정한 사실이 현실임을 자꾸 일깨웠다. 레비는 몹시 서러워졌다. 엄마가 키르마의 남자를 선택했을 때, 유일한 혈육이 죽었을 때, 레비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괜찮은 게 아니었다. 다만 옆에 단테가 존재했기에 금방 추슬렀을 뿐. 하지만 믿었던 단테마저도 사실 레비의 편이 아니라고 하니 그때 묻어두었던 감정들까지 전부 휘몰아쳐 레비를 뒤덮는 것 같았다..
“작별 인사는 다 끝냈나?”
“…….”
“그럼 슬슬 보내지 그래. 너무 오래 기다린 것 같은데.”
“…….”
“얼른 쏴, 단테. 어서!”
유조의 명령에 총구는 목에서 뒤통수로 옮겨졌다. 날카로운 금속이 살가죽을 짓눌렀다. 명확한 죽음의 감각. 하지만 레비는 초연했다.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세상. 레비에겐 이곳이 지옥과 다름 없었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몇 분일지, 몇 초였을지. 그런 건 아무도 가늠하지 못할 만큼의 오묘한 흐름이었다. 오르카는 이 한심한 대치상황을 보며 언성을 높였다.
“죽이지 않고 뭐 해! 내 말이 들리지 않나?”
하지만 단테는 미동도 없었다. 하다못해 심적으로 동요했다면 숨소리라도 흐트러졌을 텐데. 그는 호흡조차 흔들리지 않고 고요했다. 그 모습을 보며 오르카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성가시게 하긴. 이제와서 동정심이라도 생긴 건가?”
“…….”
“그래. 상관 없어. 어차피 저 여자는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고.”
“…….”
“비켜! 너도 총 맞아서 죽고 싶지 않으면.”
그 말과 동시에 오르카는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냈다. 하지만 레비의 신경은 온통 다른 데에 쏠려 있었다. 단테 때문이었다. 그는 포박을 잠시 느슨하게 푼 후, 레비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그와 동시에 단테는 레비를 잡아 당겨 창문의 바깥으로 힘있게 밀쳤다.
“…!!”
쨍그랑!
유리에 몸이 아프게 부딪혀 깨지고, 레비는 그대로 3층 아래로 추락했다.
그와 동시에,
쾅!!!
큰 폭발음이 건물에서 울려퍼졌다. 그건 분명 오르카가 꺼낸 권총 따위로 만들어낼 수 있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폭발은 분명 단테가 만들어낸 울림일 것이다.
그렇게 기나긴 복수의 굴레는 죽음으로써 완결되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레비는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에 사로잡혔다. 자신은 또 버려졌기 때문이다. 엄마에게도. 단테에게도. 아릿한 이 고통은 온 몸이 망가져서 느껴지는 건지. 마음의 문제인 건지. 아득해지는 의식을 잡을 기운도 없다고 생각하며, 레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후.
레비는 오르카의 아지트 인근의 뒷골목에서 그대로 눈을 떴다. 폭발의 여파인지 여전히 귀가 먹먹하고 온몸이 얼얼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아픈 건 방금 전에 있었던 단테의 배신, 그리고 죽음이었다.
그래서 단테는 왜 그랬을까.
왜 그는 키르마에 충성하면서 나를 거두고, 나를 죽이지 못한 걸까.
죽은 사람은 답할 수 없으니 답은 오로지 레비가 판단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경찰차 사이렌 소리. 골목의 퀴퀴한 냄새. 그 모든 것들이 천을 한 겹 덧댄 것처럼 먹먹하게 다가왔다. 멍하게 서있던 레비는 무심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 손은 공교롭게도 단테가 준 쪽지를 절대 놓지 않겠다는듯 꽉 쥔 채 힘이 들어가 있었다.
“…….”
버릴까, 말까. 읽을까, 말까. 레비는 생각했다. 이 쪽지엔 분명 답이 적혀 있을 테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읽으면 분명 자신은 그를 용서해 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온전히 선택은 레비의 몫이었다.
‘이건 너무 치졸하지 않아 단테 씨? 내가 제일 궁금해하는 질문의 답을 인질로 잡아서 날 협박하다니…’
숙고 끝에 레비는 쪽지를 열었다. 키르마에 대한 이야기일까. 단테 씨 개인에 관한 내용일까. 하지만 펼쳐진 쪽지에는 예상 외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란시아 스트리트 6번길 2층 1호. ‘위웬’이 전부 알려줄 거다.>
위웬.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아니, 이름인지, 직책인지, 뭔지 추측도 어려운 이국적인 발음의 단어였지만. 아무튼 단테의 입은 커녕, 다른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주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디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단테가 그 곳에 데려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만 둘까. 레비는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레비가 쪽지를 연 순간부터 답은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그는 무거워진 몸뚱아리를 간신히 일으키며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당연히 아란시아 스트리트 6번길 2층 1호. 답을 얻기 위해 그는 나아갔다.
도착한 곳은 중국에서 수입해온 약재를 파는 평범한 약품 창고였다. 레비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도자기처럼 섬세한 인상의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그의 첫 인상은 매우 예민해 보였는데, 레비의 얼굴을 슥 보더니 곧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그를 반겼다.
“어서와.”
“당신은…”
“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우선 앉을래?”
“…….”
레비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웬은 말이 짧은 사람을 대하는 일이 익숙해 보였다. 그는 여전히 차분한 미소를 띄운 채 사무실 안으로 레비를 안내했다. 쌉싸름한 약 냄새가 풍기는 방 안. 응접 테이블 앞에 레비를 앉혀놓은 후 위웬은 따뜻한 차를 타 그에게 건넸다.
“단테는 내 이야기… 안 했지?” 위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역시 그렇구나. 그럼 많이 당황했겠어.”
레비는 위웬이 건넨 차를 마시지도 않은 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위웬은 개의치 않다는 듯 간식거리도 꺼내 와 옆에 늘어놓았다.
“음… 우선 미리 말해야겠네. 나 역시 ‘키르마’야. 정식 조직원은 아니지만… 니나 키르마에게 충성을 맹세했거든. 단테처럼 말야.”
“그렇구나.”
“어렸을 때의 단테는 마치 너 같았다고… 단테가 말했었어.”
“부모도 없고, 오갈 데도 없었지. 그런 단테를 데려다가 잘 곳을 마련해주고, 기술을 전수해준 게 니나야. 단테의 입장에선 니나가 정말로 생명의 은인인 셈이지.”
“너무 ‘키르마’를 옹호하는 것처럼 들렸을까. 그건 미안해.”
레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위웬은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맹세하는데, 단테는 네가 키르마를 미워한다는 걸 알고, 감시하려고 곁에 둔 게 아니야.”
“그 애 성격상… 알았다면 귀찮다며 돈이나 좀 쥐여주고 떠났을 테고.”
“단테가 왜 널 거뒀는지, 그건 그애 말곤 모르겠지만.”
“…단테는 내게 네 얘길 꽤 자주 했었어. 난 그걸 듣는 게 제법 좋았고.”
“평범한 가족의 일상처럼 들렸거든.”
레비는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을 찡그린 채 고개를 숙이고 위웬의 이야길 듣고 있을 뿐이었다.
“…있지, 레비.”
“단테를 용서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렇지만…”
“이건 받아줄래?”
“단테가 네게 남긴 거라, 내가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단 생각이 들어서.”
위웬은 고개 숙인 레비의 앞으로 무언가가 든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하지만 레비는 쉽사리 그 봉투를 열지 못했다. 위웬은 잠시 고민 끝에, 직접 그 봉투를 열어 레비에게 보여주었다. 봉투 안에는 수표 몇 장과 편지, 자동차 키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건…”
“네 거야. 단테는 네가, <클리닝>을 그만 두고 일반인으로 살길 바랐거든. 굳이 자동차를 남긴 건… 글쎄. 단테의 꿈과 관련이 있으려나. 그애는 차를 좋아하잖아.”
“…….”
위웬의 설명을 들으며 레비는 단테의 편지를 펼쳤다.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에 상당히 악필로 쓰인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 역시 키르마이니, 나의 죽음으로 복수를 마무리했다고 생각해 줘.>
레비는 말을 잃었다. 그 편지를 흘끔 쳐다본 위웬 역시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위웬이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걸 직감한 레비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단테 씨는 정말 최악이야.”
“이게 유언이야? 이게 나한테 할 말이냐고!”
“위웬 씨, 위웬 씨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
“난 진짜, 평생 용서 안 할거야. 단테 씨도, 키르마도.”
결국 레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소리는 죽어 있었지만 몸이 간간이 들썩이는 게 보였다. 위웬은 하릴없이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레비는 한참 동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위웬은 비록 레비를 오늘 처음 만났지만, 군말 없이 그를 위로해주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랬다. 그건 동정이 아니었다. 레비가 정말로 바란 건, 돈도, 자동차 열쇠도 아닌, 온기를 나눌 수 있는 가족이라는 것을, 위웬은 완전히 이해했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