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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

A BETTER TOMORROW

 한때 암흑가의 유능한 조직원이었으나, 조직의 계략에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깨끗한 새 삶을 시작한 현진. 그런 현진을, 경찰의 길을 걷기로 한 동생 현연과, 현진과 함께 암흑가의 화려한 나날을 보냈으나 몰락한 채 때를 기다리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채정인이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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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95분

느와르 · 액션 

 리치 농장의 보안 요원, 현진의 삶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창문부터 열었다. 그 후 냉수 한 모금을 마시며 여유롭게 풍경을 관람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날 역시 평소처럼 날이 아주 맑고 따뜻했다. 거대한 리치 농장이 다수 포진해 있는 지역 다웠다. 햇빛을 쐬며 그는 보안 요원 유니폼으로 탈의했다. 꼭 챙겨야 하는 카드키 몇 개를 챙기면 간단한 출근 준비가 끝났다. 빌라 형태의 기숙사에서 농장까진 자전거로 5분도 채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느긋하게 아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출근하면 부지런한 농장 동료들이 현진을 반겼다. 그는 어울리는 걸 몹시 좋아하는 성격으로,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는 이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덧 업무 시간이었다. 동료들은 리치를 가꾸기 위해 농장으로 들어가고, 그는 작은 트럭을 몰며 농장 외부를 순찰했다. 그의 주 업무는 농장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었는데, 워낙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있는 농장인지라 그는 외부인보다 야생 동물의 출입을 더욱 경계하곤 했다. 그렇게 농장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정확하게 점심 시간이 다가왔다. 그는 비록 보안 요원이었지만, 일손이 부족한 농장이었기에 직원들에게 도시락을 전달해주는 일 역시 담당하곤 했다. 직원들은 다 같이 둘러앉아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그날의 가십에 대해 떠들었다. 이러니 농장 사람들은 서로의 속옷 사정까지 다 알게 되는 것이다.
현진은 늘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항상 사무실로 들어가 농장 앞으로 온 우편을 처리하곤 했다. 답장이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 그리고 편지의 내용을 요약해 고용주에게 전달하는 간단한 업무였다. 그 후 다시 한 번 순찰을 돌고, 직원들이 사용하는 시설의 정비를 마치면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계절에 따라 해가 먼저 지거나, 해가 늦게 지는 등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그 언저리에 현진은 퇴근하곤 했다.
오늘도 현진은 평소처럼 모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회고했다. 유별난 일 없이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이렇게 지내게 된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처음엔 남의 옷을 주워입은 것처럼 낯설었으나, 이제는 완벽히 ‘나의 삶’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과거의 일이 종종 파도처럼 밀려오는 날도 있었다. 두고 온 사람도, 두고 온 추억도 모두 사무치게 그립곤 했다. 하지만 그뿐. 현진은 돌아갈 수 없었다. 현진의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쳐진다는 건 그런 거다. 그래서 현진은 차라리 잊길 택했다. 그는 언제나 현실을 살아가려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반추하고 옛 시절에 잠겨도 어떻게든. 외면한다는 건 다시 말해 그의 생존전략인 것이다.
그리고 두고 온 과거의 그림자가 현진을 덮쳐온다…
커피를 타고 오니 창 밖에서 쏴아아, 하고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나기인가. 그런 예보는 없었는데. 현진은 중얼거리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소나기라기엔 빗줄기가 굵고 험했다. 아직 장마철도 아닌데. 게다가 오늘은 분명 종일 해가 맑지 않았던가. 참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뿐. 그는 창문을 닫고 널어 둔 빨래를 걷기 위해 침실 발코니로 향했다. 이미 비바람에 의해 빨래가 반쯤 축축해진 상태였다. 잽싸게 옷가지를 걷던 와중 주변에 섬광이 터졌다. 그리고 뒤늦게 이어지는 천둥 소리.
우르릉, 쾅, 쾅!
아무래도 폭풍우인 듯했다. 현진은 대충 옷을 집 안에 던져놓고, 다른 열린 창문은 없는지 집 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다행히 화장실 창문 외에는 모든 창이 꼼꼼하게 닫혀 있었다. 한숨 돌린 현진은 대충 젖은 옷들을 세탁기에 집어 넣은 후 마시다 만 커피를 후루룩 들이켰다. 시간은 늦지 않았는데 어쩐지 피곤한 기분이었다. 급작스러운 폭풍 때문일까. 그는 내일 일터가 어수선하겠다고 생각하며 간단히 씻었다. 그리고 모든 집을 소등한 뒤,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실 문을 열었다.
그 때였다.
다시 번쩍, 빛이 퍼지고 침실 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하지만 현진의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우르릉, 쾅!
천둥이 목소리를 완전히 집어삼켜졌기 때문이다.
어둠 속으로 완전히 숨어든 인영은 조심스레 현진의 쪽으로 다가왔다. 현진은 방의 불을 켜기 위해 벽을 더듬었지만, 새로운 광원이 피어나는 게 더욱 빨랐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이 붉은 빛으로 타올랐다. 그건 불이었다. 편지를 태우고 있는 불. 
“넌…”
신기루처럼 일렁이는 불길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비췄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은 마치 번개의 자국처럼 어지럽게 갈라져 젖은 피부 위로 달라붙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 위로 차가운 눈동자만 불길을 반사하며 빛났는데, 분명 동공이 반짝이고 있음에도 기저에 깔린 짙은 어둠이 사내의 얼굴을 휘감았다.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
입을 열었지만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현진은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꼈다. 조직을 탈출한 후로 잊고 살았던 그 감각. 손님이라기보단 사신에 가까운 방문객이 그 감각을 더욱 증폭시키는 중이었다.
현진이 채 말을 잇지 못하자, 맞은편의 남자가 대신 답했다.
“채정인입니다. 혹시 잊으신 건가요.”
“그럴리가… 난, 그냥…”
“왜 여기 있냔 얼굴이시네요.”
자신을 채정인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여유롭게 편지에 붙은 불을 옮겨 입가로 가져다댔다. 담배에 불이 옮겨붙으며 편지는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졌다. 작은 담뱃불은 어둠을 밝히기엔 너무 미약해 두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눈과 간간이 들어오는 천둥빛에 의존해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건 제가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선배님.”
“…….”
“왜 떠나신 거죠.”
“그건…”
현진이 입을 엶과 동시에, 목에 서늘한 무언가가 닿았다. 분명 그건 총구일 거라고, 그는 직감했다. 정확하겐 현진의 무뎌지지 않은 조직원으로서의 감각이 외쳐대고 있었다. 개인적인 원한일까. 아니면 조직의 명령일까. 현진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정인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런 가짜 편지를 남겨두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가짜가 아니야, 난…”
“예.”
“진심이었어. 그 편지를 쓸 때에는.”
그러나 현진의 말은 정인에게 그저 사라져버린 편지의 잿가루처럼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러시겠죠. 그런데 마음이 바뀌신 거고요.”
“아니야.”
“그럼요. 뭡니까.”
“…….”
“건실한 삶을 사는 데에, 조직원인 저는 방해가 되니까.”
“그래서 떼어놓으려고 하셨던 거 아닙니까.”
“확실히 이쪽이 더 선배님께 어울리긴 합니다.”
“좋아 보이던데요. 농장 일 말이에요.”
“이미 뒷조사까지 마쳤나보군.”
“예. 철저한 사전 조사. 선배님이 가르쳐주셨잖습니까.”
하아. 현진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깊게 얽힌 오해의 실타래를 어떻게 풀지 막막해서였다. 하지만 정인에게 그 행위는 자극 내지는 도발이었다. 그는 여유로운 체 했지만 현진의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질리셨나요.”
“아니, 아니야. 그렇지만 설명해도 과연 네가 믿을 지는 모르겠군.”
“납득시킬 자신이 없는 거겠죠.”
“듣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그 말에 정인이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그러자 마치 주변의 시간까지도 멈춘 것처럼 사위가 단번에 고요해졌다. 완벽한 침묵. 폭풍우 치는 소리만 들려오는 방 안에서 두 사람은 잠시 대치했다. 이내 정인은 고개를 떨궜다.
“그럴 리가요, 선배님.”
철컥, 익숙한 소음. 총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쇳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정인은 총구로 현진의 목울대를 강하게 누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듣고 싶어서 온 겁니다, 저는.”
“선배님이 왜 그랬는지.”
“왜 조직에 저만 남겨두고 갔는지.”
“편지에는 왜 거짓말을 적어둔 건지.”
“전부 듣고 싶어서.”
“그런데 선배는 별로 얘기할 생각이 없어 보이네요.”
“그렇다면… 쓸모가 없잖아요.”
정인은 총을 목에 댄 채 현진의 어깨를 짚고 조용히 그의 뒤로 돌았다. 어느새 총구는 턱을 지나 뒷목 한 가운데에 정확히 멈춰섰다. 그 모든 위협에도 현진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딱히 무서워하는 기색도, 겁먹은 얼굴도 아니었다. 정인은 나긋하게 웃으며 그대로 뒷목을 몇 번 두드리더니, 총구를 아래로 향해 척추를 따라 쓸어내렸다. 마치 대답을 종용하는 것처럼. 현진 역시 그 의도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마침내 총구가 허리쯤에 닿자 현진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
"......" 그건 정말 완벽하게 정인의 말문을 막는 대답이었다. 
"유언은 그게 끝입니까."
"그래."
현진은 무장 해제를 선언하듯 양 손을 가볍게 위로 들어올렸다. 마치 쏠 테면 쏘라는 듯한 투였다. 하지만 정인은 곧장 알아차렸다. 이 남자는 알고 있는 것이다. 절대로 자신이 그를 쏘지 못 할 것임을. 순간적으로 정인은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 열기도 잠시 뿐. 떠나간 사람에게 더이상 열정을 쏟고 싶지 않았다. 그는 조직의 명령을 떠올리며 차분히 마음을 갈무리했다.
“알겠습니다.”
“유언은 잘 전달해드릴게요.”
“그럼…”
퍽.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현진의 몸이 앞으로 고꾸러졌다. 정인이 손날로 급소를 가격해 그대로 현진을 기절시킨 것이다. 정인은 쓰러진 현진을 주워 들쳐 업은 후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몇 년 전엔 분명 죽긴 커녕, 쓰러지지도 않을 것 같은 남자였는데. 정인은 무상함을 느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보스가 산 채로 데려오라고 해서요.” 참으로 완벽한 하루. 완벽한 임무. 완벽한 복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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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정보

출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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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

Hyunjin

검황, 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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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정인

Chae Jeon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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